박완서 소설 '엄마의 말뚝' 배경지를 찾아서

“글공부를 잘 해야지 바느질 같은 거 잘할 생각 마라. 손재주 좋으면 손재주로 먹고 살고 노래 잘하면 노래로 먹고 살고 인물을 반반하게 가꾸면 인물로 먹고 살고 무재주면 무재주로 먹고 살게 마련이야. 엄만 무재주도 싫지만 손재간이나 노래나 인물로 먹고 사는 것도 싫어. 넌 공부를 많이 해서 신여성이 돼야 해. 알았지?” - 박완서 '엄마의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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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에서 문산을 지나 무악재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서울도성.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피란 온 실향민들은 이곳에서 문 안의 삶을 흠모하며 염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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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로 이어지는 서울 현저동 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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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사 절집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국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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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전경.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형무소 옛터에 이르자 인왕산 기슭을 따라 을씨년스레 모여 앉은 낡은 빌라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완만하게 뻗은 도로를 놔두고 부러 얼음사태가 난 계단 길을 조심조심 밟아본다. 길 가장자리론 온통 폐가다. 70∼80년 무렵 날림으로 축조된 빌라들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무너져 가는 중이고 어엿하게 한 가정의 안방을 차지했을 가구들조차 길거리에 나뒹군 지 오래다.

인왕산 옛 동네는 낡은 빌라촌으로

중턱쯤에 뜬금없이 나타난 배드민턴 코트. 게서 땀을 식히며 서울 땅을 돌아본다. 문득 그 옛날 더듬이 달린 벌레처럼 서울바닥을 누비고 다니던 전차가 시간의 강을 거슬러 되살아온다. 전선에서 불꽃이 일자 뒤따르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좋아 어쩔 줄 모르는구나. 저 아래가 영천종점일 테지. 영등포에서 출발한 전차는 서울역을 거쳐 예서 반환점을 돌았으리라.

이곳은 왜정 때부터 유명한 하꼬방 동네였다. 하꼬방(箱房)이란 일본말로 궤짝집을 말한다. 이북에서 경성으로 밀려온 가난한 유민들이 멋대로 말뚝을 박고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지리적으로 보면 개성에서 문산을 지나 무악재 고개를 넘으면 바로 이곳에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서울도성 바깥, 즉 문 밖에 위치한 이 '상상꼭대기'에서 호시탐탐 문 안의 삶을 흠모하고 염탐했다. 때론 비장하게, 때론 비굴하게.

소설 '엄마의 말뚝'에서 화자의 엄마도 매한가지다. 괴불마당 집에 말뚝을 박고 삯바느질로 억척스레 자식들을 키우는 엄마. 여기까지는 전형적이다. 허나 엄마는 시골마을 시댁에선 서울 사람 티를 내며 한껏 뻐기고, 하꼬방 동네에 와선 사대부집 며느리란 위세로 이웃집 '바닥 상것'들을 은근히 경멸한다. 어디 그 뿐인가? 딸에겐 누누이 신여성이 될 것을 강요하지만, 정작 당신은 아들이 어서 빨리 성공해 집안을 일으켜 세워주길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엄마다. 곰살궂진 못할망정 까칠하기 그지없고, 점잖은 신분과 속된 허영심의 모순 사이에서 뒤뚱대기 일쑤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삶의 의지를

해가 안산 너머로 기울고 있다. 걸음을 재촉해 인왕사 솟을대문을 지나니 절집촌이다. 석불각, 관음전, 서래암, 송림사, 천안사 등 절집들이 다닥다닥 맞붙어 있다. 그간 익히 보아온 산사와는 다른 풍경. 일흔이 넘은 인왕사 주지스님이 그 내력을 밝힌다. “조선시대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때문에 도성 안에 절을 세우기 힘들었어. 그래도 내시들이 문 밖에서 사불(私佛)을 모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던지 슬쩍 눈감아준 모양이야. 이래저래 조그마한 절들이 생겨나 촌락을 이루다 보니 오늘날 인왕사가 된 게지”

괴이한 점은 인왕사 절집촌 한가운데 조선조 무신(巫神)들을 모시던 국사당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국사당은 원래 도성 안인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던 것을 왜정시대에 이리 옮긴 것이라 한다. 사찰과 무당집의 기묘한 동거라. 이유야 어쨌든 그래서 이곳은 소망과 기도를 품고 드나드는 사람들로 사시사철 넘쳐난다. 그러고 보니 스님이 장삼을 걸치고 참선하는 모습인 선바위나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형상인 아미타부처 바위마저 예사로이 넘길 수 없다. 어쩌면 이곳은 하늘 아래 천혜의 도량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엄마가 인왕산 기슭에 삶의 말뚝을 박게 된 연유도 새로운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하긴 남을 덮어놓고 바닥 상것으로 업신여기려면 그래도 우월감이라는 숨구멍 하나 정도는 터놓아야 했을 터. 그것은 천혜의 도량에서 삶의 매순간 정성을 기울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엄마는 비가 올 때마다 내 집으로 떨어진 빗물을 한 방울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독마다 그릇 그릇 받아놓고 빨래도 하고, 세숫물로도 쓰게 했다. 세숫물에 장구벌레가 가득 들어 있어서 질겁을 하면 엄마는 체에다 바쳐서라도 그 물을 쓰게 했고 쓰고 나서도 한 방울도 버리지 못하게 했다. 세숫물로 다시 발을 씻고 발 씻은 물로 걸레를 빨고 걸레 빤 물은 괴불마당 구석에 있는 나의 꽃밭에 뿌리는 물의 완전 이용과정을 엄마는 아침마다 엄숙한 얼굴로 감시를 했다”

- 박완서 '엄마의 말뚝' 중에서 -

바람의 상처는 잊혀질 수 있을까

한국전쟁 중에 원통하게 아들을 앞세운 엄마. 세월이 흘러 그녀 또한 고향 땅이 건너다 뵈는 바다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소원을 남긴 채 쓸쓸히 눈을 감는다. 하지만 죽은 자의 소원보다 산 자의 편리가 우선인 시대가 아닌가. 손자들에 의해 공원묘지에 묻힌 엄마가 자책감을 안고 찾아든 딸에게 나직하게 속삭인다. '딸아, 괜찮다 괜찮아, 그까짓 몸 아무 데 누우면 어떠냐. 너희들이 마련해준 데가 곧 내 잠자리인 것을'.

인왕산 옛 하꼬방 동네를 내려오는 길. 그 모든 일들은 휑하니 치솟는 바람처럼 그저 지나간 세월일 뿐인가. 허나 우리의 의식은 아직도 엄마의 말뚝을 가지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제 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바람의 상처는 아무래도 잊히지 않을 성싶다.

● 가볼 만한 곳

서울도성: 인왕산 자락을 두르고 사직터널로 이어진 서울도성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조 건국 시 무학대사는 서울도성에 선바위 일대까지 포함시키면 불교가 중흥하고 천년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숭유억불을 내세운 정도전이 도성축조를 맡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우리 민족의 근현대사와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나오는 길에 독립문에서 가족사진도 찍어봄직하다.

● 찾아가는 길

인왕산 하꼬방 옛 마을(법정동은 현저동, 행정동은 천연동)은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하차 후 1번 출구로 나와 인왕사 방향으로 올라가면 된다.

서울도성은 인왕사 솟을대문을 지나 무악재 넘어가는 길에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문역 5번 출구에서 도보로 1분 거리다. 역사관을 나온 다음 독립문을 지나 찻길을 건너면 영천시장이 나타난다.

문의: 천연동사무소(02-363-2533~5)

서대문형무소역사관(02-363-9750~1)

인왕사(02-736-9984)

홈페이지: www.seodaemun.seoul.kr

글/사진 권경률 여행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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