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새파란 젊은애들이 활개 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TV는 누구보다도 노인들을 위한 장난감이다. 보신각 타종을 구경하러 나가기도 힘들고 정동진 해돋이는 꿈도 못 꾸는 노인들이 집안에서 할 일이 뭐겠는가. 그러므로 앞으로 TV는 노인들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아니 그러다간 반드시 망한다.

“만약에 TV가 없었더라면, 무슨 재미로 살까?”라는 노래가 있다. 이건 순전히 나를 위한 노래가 아닌가 싶다. 신년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직후부터 일 주일이 다 되도록 TV 앞에 바짝 달라붙어 살았다.

신년 계획은커녕 친지들에게 신년 인사 한 마디 않고, 책 한 페이지 안 읽고, 그렇다고 집안 정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소파에 몸을 깊숙이 담근 채 그저 리모컨만 눌러 댔다. 채널은 많은데 왜 이렇게 재밌는 프로는 없는 거야, 노상 툴툴 대가면서. 그리하여 이번에 크게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한 살 더 먹더니 드디어 도가 텄냐고? 저런, 어울리지 않게 그렇게 황감한 말씀을. 일상에서 건져 올린 대단히 실용적인 깨침이지. 뭐냐 하면 TV가 있는 한 나의 노년은 외롭지 않을 거라는 낙관적인 전망이다. 새파란 젊은애들이 활개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TV는 누구보다도 노인들을 위한 장난감이다.

보신각 타종을 구경하러 나가기도 힘들고 정동진 해돋이는 꿈도 못 꾸는 노인들이 집안에서 할 일이 뭐겠는가. 그러므로 앞으로 TV는 노인들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아니 그러다간 반드시 망한다. 지금처럼 젊디젊은 아이들이 나와서 아직 50대밖에 안된 여성에게 '할머니'가 어쩌고저쩌고 하다간 큰 코 다칠 거다. 암, 그렇고 말고(전국의 나이 든 여성들이여, 시청자 운동의 주역이 되시라! 억지로 짬을 내서 TV를 보는 젊은이들이 우리의 내공을 어찌 따르랴).

뭐 신년부터 새로운 여성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야심에 찬 프로젝트를 발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올해는 신년계획도 못 세웠다고 이미 고백했잖은가. 작심삼일이라도 신년계획을 세우는 게 나은 건지 아니면 '까짓 거 대충대충 살지 뭐'가 나은 건지 아직도 못 정했다. 이 해가 가기 전엔 결정되려나.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지난 며칠 동안 푹 빠져 살았던 TV에서 제일 재미있게 봤던 프로그램에 대한 감상, 이른바 시청소감이다(이렇게 함으로써 지난 며칠이 완전히 소모적이지만은 아니었다는 나름대로의 핑계가 마련되는 셈이다). 그건 시청률 순위에 빠지지 않는 무슨 미사니 하버드니 하는 드라마도 아니고 개콘이니 웃찾사 같은 개그 프로그램도 아니다. 왜 그런 거창한 제목이 필요한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지만 아무튼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식구들이 번번이 놀릴 정도로 나는 모든 종류의 퀴즈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워낙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렇겠지만 어쩌면 아득한 옛날, 나의 고등학교 시절의 아픈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TV가 없던 당시 나는 우리 학교 대표단의 일원으로 학교대항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다. 승승장구했던 우리는 결승전에서 상대였던 모 남학교에 아슬아슬한 차이로 지고 말았는데 거기엔 나도 큰 몫을 했다. 아,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때 그 문제는 바로 손문의 삼민주의가 뭐냐는, 너무나도 쉬운 문제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민족' '민생' 두 개는 쉽게 생각났지만 어찌된 노릇이 마지막 '민권'이 끝까지 떠오르지 않았다니. 나중에 교장선생님이 조회시간에 바로 그 문제를 거론하며 어찌나 아쉬워하던지.

퀴즈는 실력과 운이 맞아 떨어져야 잘 풀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경험했기 때문에 퀴즈프로에 남다른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고, 저것도 못 풀어 하며 비웃는 짓을 난 못한다. 내가 아는 문제가 나오면 맞히는 거고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못 맞히는 거다. 또 알고 있었더라도 그 때 그 순간 떠오르지 않으면 말짱 꽝이다. 인생도 그렇잖아.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운이 따라 주지 않아 평생 엉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일요일 아침의 그 퀴즈 프로그램이 특히 재미있는 건 출연자들이 그럴 수 없이 다양하다는 점 때문이다. 고등학생만이라거나 또는 청년층만이라거나 하지 않고 초등학생부터 노년층까지를 모두 아우른다. 학력도 직업도 제각각이다. 이런 프로는 거의 없다.

연초의 퀴즈대항에서 끝까지 올라간 사람은 66세의 남성이었다. 그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손주 뻘인 예비대학생을 눌렀다. 실력도 운도 좋았던 그는 금상첨화로 인상까지 좋았다. 결혼 이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또래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그에게서 신노년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고 말하면, 오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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