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네티즌들이 다 딸과 나의 가족이젠 외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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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실씨는 딸의 사건 이후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대표를 맡는 등 청소년 폭력 예방 운동가로 새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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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청소년 단체들과 함께 청소년 인권 관련 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는 조정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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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서 임재연 상담실장과 담소를 나누는 조정실씨. 조씨는 앞으로 소위 결손가정 가출 청소년들의 쉼터를 운영하며 살고 싶은 게 또 하나의 중요한 꿈이라고 한다.

“지난해 가을쯤 딸아이가 일으킨 사건을 보면서 그 애가 놀랍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했어요. 친구들과 쇼핑센터 앞을 지나가다가 40대 술 취한 남자가 엉덩이를 슬쩍 더듬었나봐요. 그 남자가 딸애를 때리려고 했는데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 그를 결국 경찰서에 끌고 갔고, 검찰에 넘겨 처벌해야 한다고 끝끝내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그 남자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이 몸서리 처지게 싫고 모멸감을 줬으니 당연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결국 딸애에게 그 남자가 아내도 없고 아이도 둘인 데다가 포장마차로 생계를 꾸리는 어려운 사람이니 우리가 용서해줘야 한다고 설득해 재판 바로 전날 고소를 취하하게 했어요”

대한민국에 사는 그 어떤 엄마보다도 청소년들을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엄마가 있다. 2000년 집단폭행을 당한 중학생 딸의 아픔을 함께 겪으면서 청소년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조정실(47)씨.

2000년 성수여중 폭력사건후 생업도 포기

소송서 이겼지만 파산선고 등 생활고 시달려

2000년 4월 발생해 한 해 동안 온 사회를 달구며 그 해 10대 인터넷뉴스로까지 선정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성수여중 폭력사건의 피해 학부모다. 5명의 중학교 2학년 여학생들이 급우 17명이 보는 가운데 한 급우를 집단 폭행, 피해 학생이 코뼈가 부러지고 무릎이 뭉개지는 중상을 입은 데다가 3년여 세월을 정신적 후유증으로 온통 앓아야 했던 사건이다.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지게 된 데는 조정실씨가 시청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 네티즌들의 심금을 울리며 도화선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탄원 글에는 자기 집 안방에서 어린 여학생이 집단 린치를 당하고 있는데도 아는 척조차 하지 않았던 가해학생 엄마의 소름끼치는 무심함, 학교, 경찰 측의 둔감하고 소극적인 대응 행태 등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어 읽는 이들의 가슴을 분노로 붉게 물들였었다.

폭력예방가·청소년 '사랑전도사'로 맹활약

딸의 사건 이후 조씨는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대표를 맡는 등 청소년 폭력 예방 운동가로 새 삶을 걷고 있다. 조씨에게 올해는 유난히 기쁜 해다. 그동안 생활고로 2003년 말 잠정 중단했던 청소년운동단체 활동을 올해부터는 비정규직이나마 직장을 얻어서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은 데다가 해킹당해 휴면기에 들어갔던 '우리 아이'(www.uri-i.or.kr) 홈페이지를 1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목마르게 도움을 청할 때 '댓글' 한 줄이라도 올려 치명적 사고를 미연에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한 셈이다.

무엇보다 그의 딸이 꿈 같이 수능시험을 치르고, 꿈 같이 고등학교 정상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난 연말 머리를 짧게 잘랐고, 이젠 화장도 하고 스커트도 입고 멋도 부려요.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젠 '여자'로 살고 싶어요. 아이가 여섯 살 때 남편과 이혼한 후 아이에게만 매달려 사느라고 늘 퍼덕 퍼덕 힘들었어요. 이젠 딸애에게 큰소리도 쳐요. 엄마, 너 참 열심히 키웠어, 이제부턴 니가 엄마 하고 싶은 것 다 해줘, 엄만 공부도 하고 싶고 이성교제도 하고 싶거든 하고 말이에요(웃음)”

청소년 네티즌들에게 '푼수 엄마', 친구들에게 '엽기 쾌활 아줌마'란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마냥 낙천적이고 행복해 보이는 조씨지만 딸의 사건 이후 그의 삶은 결코 평탄치 못했다. 아니, 모든 것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사건 직전만 해도 막내 여동생과의 공동 경영으로 순매출액이 일대에서 수위를 달리던 알짜배기 음식점은 딸의 치료와 가해 학부모, 학교, 경찰과 검찰 등을 상대하느라 폐점할 수밖에 없었고, 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2002년 말 막 시작한 통닭 배달점은 조류독감 파문에 휩쓸려 권리금조차 건지지 못한 채 빚만 떠안겼다. 그는 틈틈이 전단 붙이는 잡일을 해가며, 여동생은 경리직원으로 취직해 근근이 생계를 꾸려왔지만, 그동안 누적된 카드대금과 대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고, 지난해엔 결국 파산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00년 당시부터 네티즌들의 성원에 힘입어 시작한 손해배상소송이 2003년 초대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강지원 변호사가 맡은 이후 지난해 2월 결국 승소로 매듭지어졌고, 조씨의 딱한 사정을 안 강 변호사가 내친 김에 파산선고 소송까지 무료로 맡아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2002년 가해학생들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체험을 했다.

요즘도 조씨의 휴대폰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번호를 바꿔도 어떻게 알아내는지 용케도 전화를 걸어온다. 이들은 물론 학교폭력 피해 학부모들. 조씨의 역할은 전문적 상담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그들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고, 그들이 통곡하면 같이 통곡해주고, 소리치고 욕하면 같이 소리치고 욕하고 하면서 그들의 심적 아픔과 같은 보조를 취하는 것이다.

“여동생은 '언니가 또다시 운동을 하러 뛰어다니면 우리 식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리지만, 피해 학부모들의 전화가 오면 도저히 내 힘으론 그들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냥 그들을 향해 막 뛰쳐나가는 수밖에.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나도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조씨는 사건 후 얻은 게 참 많다. 무엇보다 인터넷을 통해 그와 그의 딸을 지지해마지 않는 수많은 자식 형제들을 얻었고, 사건 여파로 식구와도 눈 마주치기가 싫어 베란다를 건너 화장실로 줄달음치던 딸아이가 학교폭력 반대시위까지 나가 앞장설 정도로 자신감을 얻었다. 그 자신도 정말 두려운 것이 없어져 버렸다. 사건 당시 40대 검사로부터 “(합의금) 얼마나 받으려고 그래? 아이들이 싸운 것 가지고”라는 말과 함께 제출한 고소장이 얼굴로 날아오는 수모까지 당했지만, 이후 단련되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져 그 검사 멱살을 붙잡으려고 덤벼들었다”

“이젠 딸애에게 그 때는 못 지켜줬지만 이젠 모든 걸 할 수 있는 '산'이란 걸 입증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당당히 살고 싶어요. 97년부터 2002년까지 수능시험을 여섯 번이나 볼 정도로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앞으로 문예창작과 같은 데로 진학해 사람들을 웃게 하는 진솔한 글을 쓰고 싶어요”

그의 꿈은 또 하나 있다. 바로 가출 청소년을 위한 쉼터를 작게라도 시작하는 것.이 매서운 경기한파 속에서도 그의 꿈이 실현되는 모습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은 조급증에 벌써부터 시달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글=박이은경 편집국장pleun@

사진=이기태 기자 lee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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