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요즘도 황새 같은 기도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뱁새로서의 본분을 잊지 는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기도하지만 그보다 우선 나 자신부터 늘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기도를 자주 한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 인간에겐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충분히 알 만큼 인생을 겪었지만 아직도 내겐 종교가 없다. 어렸을 때처럼 종교에 대해서 시니컬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종교에 대해서 마음은 활짝 열렸는데 정작 하나의 종교를 골라서 거기 맞추어 산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다.

거의 십년 전쯤 남편의 사업실패로 한동안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종교가 있었다면 훨씬 쉽게 견디리라는 확신이 있었음에도 나는 끝내 교회나 절을 찾지 못했다. 종교인들이 들으면 너무 유치해서 웃지 않을 수 없을 핑계일 테지만, 평소엔 모른 척하다 어려워지니까 매달린다는 게 스스로 용납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웃들은 그게 바로 종교의 존재이유라며 나를 달랬지만 그렇게까지 이기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터무니없는 오기 같은 게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당시 언니처럼 나를 품어준,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한 선배에게 건방진 청탁(청탁이 아니라 거의 강요 수준)을 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그 당시로선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수렁에서 가볍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선배의 기도 덕분이라고 난 굳게 믿고 있다. 워낙 신심이 깊은 사람이니까 기도발도 끝내준 거다.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던가. 앞으로 어려운 사정이 풀리면 반드시 종교를 갖겠노라던 결심은 정작 태평성대에 들어서자 이내 사그라들었다. 한마디로 게으름 탓이다. 게다가 워낙 매이기 싫어하는 기질이 날이 갈수록 더 승해지기만 한다. 교회고 절이고 꼬박꼬박 어떻게 나가나. 지금 정도로 슬렁슬렁 사는 것만 해도 벅찬데. 혹시 낯선 사람들 만나면서 공연히 스트레스만 가중될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나도 달라진 게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기도를 한다는 사실이다.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기도문이 또박또박 울린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기도문이.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노릇이다.

내겐 우스운 추억이 하나 있다. 큰애가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 어느 휴일 남편과 함께 공주 마곡사에 간 적이 있다. 때마침 그 절도 다른 절들처럼 자녀들의 합격을 비는 백일기도가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법당에서 절을 하면서 내 아이를 합격시켜 달라는, 지극히 작은 기도를 차마 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학부모연대라는 교육운동단체의 공동대표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기도는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모든 아이들이 이번 입시에서 자신의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도록, 나아가 아이들이 입시에 찌들지 않고 자유롭게 자라날 수 있는 세상이 오도록 부처님께서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기도였지만 엄마라는 위치에서는 무언가 위선적인 기도가 아닌가 순간적으로 마음이 찜찜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남편이 멋쩍은 표정으로 하는 말, 난 우리 동훈이(큰애 이름) 합격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나. 아이쿠, 여보슈,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인 기도를 할 수 있느냐며 퉁을 놓았지만 찜찜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기에 뱁새가 황새인 척하면 안 된다니까.

요즘도 황새 같은 기도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뱁새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기도하지만 그보다 우선 나 자신부터 늘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기도를 자주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서로 상생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도하지만 그에 앞서 내가 누구를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새해를 며칠 앞두고 서·동남아시아에서 듣지도 못했던 지진해일이라는 엄청난 재앙이 몰아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 가족을 잃은 이들의 비탄에 잠긴 모습들을 화면으로 지켜보자니 인간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지 새삼스런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또 이번 재앙이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재앙의 예고편은 아닐까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찾아온 새해를 맞아 나는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복 많이 주십시오, 하는 일마다 잘 되게 해 주십시오, 몸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잘 죽게 해 주십시오, 서로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읍시다. 아니 요즘 식 맞춤법을 따라 새해 '봉마니' 받읍시다. 그리고 복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착하게 삽시다. 지진해일 따위야 오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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