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평소에도 자주 만나지만 해가 바뀌기 직전 꼭 함께 모여서 한 해를 마감해야 올해도 그럭저럭 살만했다는 기분이 든다. 내년을 살아갈 힘도 얻고… 안 그러면 외롭고 서글퍼서 어떻게 살겠어?

이제 겨우 바뀐 연도를 제대로 쓴다 싶은데 벌써 또 해가 바뀐다. 두 달 전인가, 어떤 모임에서도 독자가 내민 책에 사인을 하고 날짜를 쓰는데 무심코 2003년이라고 썼다. 아차 싶었는데 30대로 보이는 그 독자 웃으며 하는 말이, '저도 그래요'였다.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위로였을까. 바쁠 땐 바빠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명색이 안식년(내 맘대로)으로 한껏 덜 바쁘게 살았는데도 시간은 가속도로 달려간다.

올 연말에는 유난히 이런저런 송년모임에 자주 나갔다. 나이 탓인가 보다. 흔히들 하는 말이, 나이가 들면 누가 오라고 부를 땐 무조건 나가야 한단다.

공연히 바쁜 척 하고 값 올린답시고 뻗대봤자 조금 지나면 아무도 불러 주지 않는다나. 분명 그런 걱정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나이가 들수록 한해 한해를 무사히 보낸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커가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올해는 뭘 이루었을까 돌아보며 반성하고 자책하기 일쑤였던데 반해 이제는 그저 이 험한 세상을 별 대과 없이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지고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위에 고맙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단과대학 동기생 모임이라는 델 다 나가 봤다. 40년 전 어떤 시기에 어느 학교를 우연히 함께 다녔다는 것만으로 새삼 무슨 연대감이 생기겠느냐는 생각에 한번도 안 나갔었는데 올해 따라 여자 동창 하나가 아주 열심히 권유를 하는 바람에 마음이 쏠렸다. 마침 장소도 집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었던 게 큰 몫을 했다.

예상대로 아주 어색한 분위기였다. 사실 우리 때 남녀 공학이라는 건 무늬만 공학이지 아직도 남녀 간에 내외가 심했던 시절이라 같은 과 남학생 말고는 말을 나눠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늙은 모습 뒤에 숨은 젊은 청년의 얼굴을 찾는 재미가 있을 수 없었다. 자리 배치도 여전히 남학생 따로 여학생 따로였다.

공유할 추억이 없는 관계라는 건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냥 남남이었다. 우연히 같은 칸에 타게 된 지하철 승객들처럼.

앞으로 이 모임이 재미있어지려면 결국 지금부터라도 추억거리를 함께 쌓아가야 한다는 말인데 그러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겨우 어색함이 사라질 즈음 모임이 끝났는데 단체사진을 찍자는 제안이 나왔다. 나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젊었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면 비교하는 재미라도 있지, 이건 왠지 생뚱맞은 짓 같아서였다.

송년 모임은 역시 작을수록, 그리고 익숙할수록 좋다. 엊그제도 작은 송년모임에 나갔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들로 이루어진 아주 오래된 모임이다. 몇 십년 동안 1년에 몇 차례씩은 아내든 애인이든 그들의 짝들까지 함께 모였기 때문에 여자들끼리도 오래된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다.

젊은 한때는 다들 좋은 일들만 생길 거라고 큰 소리 치던 적도 있었지만 사는 게 어디 그리 만만한가. 어느 새 아내와 사별한 친구도 생기고 이혼한 친구들도 생기더니 작년엔 죽은 친구도 생겼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건강들도 안 좋아지고 그 위에 연로하신 어머니 때문에 몸고생 마음고생을 하는 이도 있다.

그렇게들 조금씩 변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이 들어감을 확인하고 삶의 기쁨과 고달픔을 나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 인생∼”이라는 탄식이 흘러나오게 만드는 일이 몇 건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금년에 있었던 좋은 일들만 기억하면서 왁자지껄 한해를 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올해도 달랑 며칠 안 남았는데 송년모임은 아직도 네 건이나 기다리고 있다. 모두 작고 오래된 모임이다. 그 중에 가장 작은 건 꼭 다섯 사람만 모인다. 나만 빼곤 다들 점잖은 사람들인데 무슨 조화인지 모이기만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깔깔거리다 헤어진다. 평소에도 자주 만나지만 해가 바뀌기 직전 꼭 함께 모여서 한 해를 마감해야 올해도 그럭저럭 살만했다는 기분이 든다. 내년을 살아갈 힘도 얻고.

그러고 보니 꽤나 씩씩한 척, 고고한 척 하는 나도 실은 아주 의존적이고 게다가 번잡스럽기까지 한 인간인가 보다.

세상도 어지러운데 조용히 한 해를 마감하면 어디가 덧나기에 이렇게 난리람. 그럼, 이 세상 혼자 늙어가는 게 아니라 모두 다 함께라는 걸 이렇게라도 확인하고 넘어가야지, 안 그러면 외롭고 서글퍼서 어떻게 살겠어?

새해에는 모두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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