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캐럴이 울려퍼지는 이맘때쯤이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가슴 설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기 예수의 탄생이 지구상의 모든 종교, 문화, 관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이 경이로움 속에서 예수의 탄생을 그리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얼마 길지 않은, 두 이야기를 묵상해 본다. 과연 예수의 탄생이야기가 실제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리고, 여성의 입장 곧 여성의 경험에서 본 탄생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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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여성들. 꼭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경제 불황이어도 크리스마스의 설렘과 즐거움은 여전하다. <이기태 기자 leephoto@>

여성신학의 관점에서 본 성탄의 의미를 두 가지로 지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마태복음 1장 23절의 “보아라, 동정녀(어떤 역본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라는 구절에서 드러나고 있는 동정녀(처녀) 탄생설은 분명히 가부장적인 기제에 의해 굳어진 표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구약의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한 것으로, 동정녀(처녀)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젊은 여인'이란 뜻의 '알마(almah)'라는 단어로 쓰였다. 이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란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예수를 여자에게서 난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예수의 처녀탄생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유대인에게 예수의 탄생은 문자적으로 그리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둘째,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오직 아메바(이분법적 번식: 일정 정도 성장하면 저절로 둘로 갈라진다)만 제외하고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에 의해서만 번식하게 되는데, 예수의 탄생이 또한 예외가 되었다. 소위 남성의 씨(?) 없이 여성의 몸에 예수를 잉태했던 것이다.

이로써 여성성이 극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성주의가 그렇고 여성신학이 그러하듯이 종교적인 제의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강조되는 경우에는 여성의 경험이 중시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예수의 탄생에서는 모성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영역만이 아닌,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신이 우리의 정신적 탄생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모든 여성신학적 의미 부여에도 불구하고 탄생 자체가 갖는 궁극적인 의미는, 그 사람의 생애가 갖는 총체적인 의미와 맥락에 의해 되짚어 보았을 때만이 비로소 제 빛깔을 찾을 수 있다. 예수 탄생 이야기는 그의 사역과 십자가상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의미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이 아닌 육체의 자아가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시고, 죽여도 죽일 수 없는 존재의 큰 비밀이 있음을 보여주신 부활의 맥락에서만이 예수 탄생은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때 여성 신학은 인간 신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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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임

한국여신학자협의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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