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 전업주부로 우연히 입사, 10년여 '한 길'

“'여성'작가 평가받는 사회 돼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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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기자 leephoto@>

“'현대문학'을 만드는 일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복원·전승하는 일”

12월호로 통권 600호를 맞은 정통 순수문예지 월간 '현대문학'을 10년 넘게 지켜온 양숙진(57) 발행인은 젊은 시절 아침 일찍 일어나 창덕궁에 가 책 읽는 걸 낙으로 삼았던 문학 소녀였다. 주부였던 양 발행인은 91년 우연한 기회로 현대문학에 입사했다.

“처음 입사하자마자 황동규, 김주연, 김원일 선생들과 편집위원회의를 진행했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말단이었으니 주간한테 많이 혼났죠. 그 때를 되돌아보면 힘들었던 만큼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매달 책 한 권씩 만들어낼 정도로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친 양 발행인은 97년 '현대문학' 사상 첫 여성 발행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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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의 12월호 드로잉프로젝트로 선정된 여성 설치미술작가 윤석남의 작품.

“80, 90년대 때는 수많은 문예지, 비평지가 쏟아져 나왔어요. 당시 문학은 곧 문화권력이었죠. 우리는 순수 문예지만을 고집했기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럴수록 전통에서 새로운 비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양 발행인은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가 발굴에 주력하고 드로잉 프로젝트를 진행해 예술가들의 주옥 같은 작품을 소개해 왔다.

“TV와 영화 같은 영상매체가 지배하는 시대가 됐지만 오히려 창의성과 실험성이 돋보이는 자기 세계관이 뚜렷한 작품을 소개해온 것이 우리의 생존 비결이죠. 이 책 안에 한국의 문학, 예술, 문화사가 다 들어있으니까요”

박경리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문인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던 '현대문학'. 양 발행인은 반년 넘게 600호를 준비하면서 66년 7월호에 실린 여성 작가들의 좌담회를 다시 읽어보았다고 한다.

“여성으로 문학을 시작한 동기, 여성 작가에게 있어서 가정생활, 작품보다는 작가의 여성성으로 평가받았던 사회상이 그대로 드러난 글이었어요. 그 글을 보니 지금은 작가의 성보다 작품으로 평가받는 사회가 되었지 않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어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신념'을 갖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는 양 발행인은 수익보다는 '책'이 갖는 무한한 부가가치에 큰 의미를 두고 10년 넘게 '현대문학'을 지켜왔다.

“책을 만드는 일은 몇 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가는 장인들의 정신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나는 그저 진정성을 가지고 '현대문학'을 지켜온 선대와 후대를 잇는 중간자 역할을 할 뿐이죠”

2005년 창간 50주년을 맞는 '현대문학'은 새로운 반세기를 시작하며 또 다시 '현대적'변신을 시도한다. 600권의 표지와 목차로 구성된 아트북이 출시될 예정이고 프랑스 노작가의 작품이 1년간 현대문학 표지를 장식하게 된다.

“프랑스의 대표적 출판사 갈리마르의 산증인인 북디자이너 마르생(78)씨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작품을 표지로 만들어 줄 겁니다. 옛 것을 통해 과거를 복원하고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를 바라보는 '현대문학'의 정신을 그대로 담을 겁니다”

한국문화사 축소판 '현대문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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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문예지 '현대문학'은 1955년 1월 창간된 이래 50년 동안 한 번의 결호 없이 한국 문학·예술사를 기록해 왔다. 월간지로 600호까지 간 예를 세계사를 뒤져봐도 '현대문학'이 유일하다. 외국 유명 도서관에 비치되고 있는 한국 잡지도 '현대문학'뿐이다.

600호에는 지난 5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선 '옛 시절'의 흥취를 한껏 살린 세로쓰기와 한자 표기, 광고 등과 함께 '현대문학'에 실렸던 대표작과 화보를 엄선해 실었다.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 장용학의 '요한시집', 김춘수의 '꽃'에서부터 이범선의 '오발탄', 최인호의 '술꾼', 이문구의 '관촌수필',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 6650명과 작품 3만4000여편이 '현대문학'을 통해 세상 빛을 봤다. 또 '현대문학'은 한국 문단에 신인 작가를 내보낸 출구였다. 박재삼, 황동규, 고은, 정현종, 마광수 등 시인 327명과 이범선, 박경리, 이문구, 조정래 등 소설가 133명이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김윤식, 임헌영, 김인환 등의 평론가도 배출해 '현대문학'의 역사는 곧 한국문학사라고 할 정도다.

또 문학뿐 아니라 김환기, 김기창, 장욱진, 유영국, 김흥수, 천경자, 박영숙, 윤석남, 안규철, 구본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현대문학'을 수놓아 '현대문학'은 명실공히 한국의 문학사와 예술사를 관통하는 유례없는 잡지로 자리잡았다.

한정림 기자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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