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정서만 농경민이지 몸은 어느 새 시대의 첨병이 된 건가. 아니다,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나마 갖고 있던 자그마한 능력을 기계에 몽땅 빼앗긴 셈이다. 손이 편하자고 컴퓨터를 썼는데 결국엔 정신마저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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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가다 컴퓨터가 말썽을 부린다. 문제가 아니라 말썽이라고 하는 까닭은 차라리 심각한 문제라면 아예 새 걸로 갈아버릴 텐데 그게 꼭 말썽꾸러기 아이처럼 보통 땐 얌전하게 잘 지내서 방심하게 만들다가 어떻게 알았는지 중요한 시점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심통을 부리기 때문이다.
심심풀이로 들어갈 때면 잘만 되던 인터넷 연결이 급하게 메일을 보내려고 할 때는 몇 번이고 리세트를 눌러야만 겨우 연결이 되거나 평소엔 고분고분하게 잘 꺼지더니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할 때는 왜 그렇게 꺼지지 않으려고 버티는지 공연한 힘 싸움을 하게 만든다.
그래도 난 아직까지는 컴퓨터를 새로 바꿀 마음이 별로 없다. 그냥 살살 달래서 잘 쓰고 있다. 아무리 봐도 멀쩡한 물건인데 어쩌다가 말썽을 좀 피운다고 해서 폐기처분 한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아서다. 내가 컴퓨터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효용, 즉 글쓰기와 메일링을 큰 차질 없이 해내는 것만도 나로서는 대견하다.
우리 식구는 이런 내가 불만이다. 남편은 나보다 컴퓨터를 더 여러 방면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다. 뒤늦은 공부에 필요한 자료들을 검색하거나 내려받기도 하고 주식시세를 실시간으로 점검하는 등 재테크에 직접 이용하기도 한다. 일주일에 몇 차례 집에 들르는 둘째도 잠깐 동안이지만 컴퓨터를 여러 모로 쓰고 간다. 이 두 사람은 나에 비해 굉장히 차분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쓰다가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소리를 지를 때가 많다. 아∼악! 하는 처절한 비명에 이어지는 간절한 애원, “컴퓨터 좀 갈자∼좀∼”
하지만 내가 없을 때 몰래 사다 놓으면 모를까, 그들이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애원을 해대도 나는 꿈쩍도 않는다. 이 급변하는 과학기술의 시대에 컴퓨터 수명 5년이면 골동품이라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새 걸로 보이는 걸 어쩌랴. 어쩌다 보니 컴퓨터를 쓰긴 쓰지만 나는 아직도 농경민의 정서를 벗어나지 못한 걸.
이렇게 느긋하기만 하던 나도 오늘 아침엔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고, 이 놈(성차별적 발언을 혜량하여 주시옵길!)의 컴퓨터, 당장 갈아야지!” 글을 쓰려고 모처럼 일찍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그 놈(또또, 성차별적 발언을!)의 한글이 안 뜨는 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그래봤자 켰다 껐다의 반복이지만)를 취해 봐도 다른 건 다 되는데 한글은 안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잠이 퍼붓더라도 어젯밤에 써 놓을 걸, 어젯밤에는 말을 잘 듣는 것 같더구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죄가 이렇게 크다니 후회막급일세.
그럼 그깟 원고지 열 장짜리밖에 안 되는 글, 손으로 써서 팩스로 보내면 되지 않으냐고? 여보슈, 손으로 쓸 줄 알면 무슨 걱정이겠수? 내가 그렇게 유능한 인간인 줄 아시우?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40여년을 써 오던 펜을 버린 지 불과 10년 남짓이건만 어느 새 손으로 쓰는 법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우. 옛날엔 명필은 아닐지언정 달필이라는 칭찬을 솔찮이 들었건만 요즘은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기분입디다. 오죽하면 금년부터는 부조금 봉투에 '부의(賻儀)'니 '화혼(華婚)'이니 하는 단 두 글자를 쓰는 것조차 버거워 인쇄된 봉투를 다 샀겠수. 거, 사람 버리는 거 잠깐입디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제는 컴퓨터 앞에 앉아야 비로소 뭘 쓸지 생각이 난다는 거다. 새하얀 모니터를 마주 보아야 내 머리 속에 난마처럼 얽혀 있던 실타래 중에서 한 오라기가 뽑혀 나오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 전까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뜩이나 용량초과인 실타래를 더 어지럽게 만들기만 할 뿐, 무얼 쓸지 도무지 정리가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정서만 농경민이지 몸은 어느 새 시대의 첨병이 된 건가. 아니다, 까놓고 이야기 하자면 그나마 갖고 있던 자그마한 능력을 기계에 몽땅 빼앗긴 셈이다. 손이 편하자고 컴퓨터를 썼는데 결국엔 정신마저 그에게 의존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고질병이 있다. 마감을 못 지키지 못하는 병이다. 고장 난 컴퓨터가 이 병을 고쳐주나보다 애써 자위하며 아침을 먹고 나니, 아이고머니나, 고새 새하얀 한글화면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뭘 쓸까 고민할 짬도 없이 내 손가락은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와우! 컴퓨터 인간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