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이가 자주 체육하기 싫어 유치원도 가기 싫다는 말을 했다. 이유인즉 체육시간에 아이들이 떠들어서 벌을 서는데 엎드려뻗쳐를 한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 '엄마, 근데 왜 잘못하면 벌을 세울까? 친절하게 타일러도 될텐데…' 아이에게 친구들과 해결방안을 모색해 보라고 이야기를 하고 유치원에 보냈는데 영 마음이 찜찜하다.

며칠 후 다른 엄마들을 만날 기회가 생겨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반응이 의외다.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요즘 애들 너무 오냐오냐 해서 키우니까 그 정도는 괜찮아요. 애들 좀 강하게 키워야 해요.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라면 '허걱!'이다.

강하다는 건 어떤 불의나 불평등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마음과 체력이 아닌가? 또 이런 상황에선 선생님에게 어린아이들이 체육시간에 조용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동시에 신체적인 벌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마련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게 진정으로 강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벌을 주고 벌을 받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으니 너 한번 혼나봐라. 너도 고통을 받아봐라'하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경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전되지 않으니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방안을 마련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벌의 의미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정이나 학교, 유치원, 군대를 비롯한 각 조직이 조직원에게 신체적인 벌을 주는 것은 폭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피해자가 폭력이라고 여기면 그게 바로 폭력이다. 폭력을 당하는 대상이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떠들었다는 이유로 신체적인 벌을 주는 것은 일곱 살 짜리 아이들의 입장에서 엄연히 폭력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 정도쯤이야'하더라도 아이들은 고통스러워한다면 말이다.

남성들이 '그게 무슨 폭력이야? 관습이고 일상이지'했던 것들을 폭력으로 규정짓고 법제화하고 있는 여성들이 더 예민하게 촉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바로 과거의 현재의 우리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또 다른 소수자들이 느끼는 고통을 폭력으로 인식하고 폭력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는 작업,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폭력에 익숙한 아이들이 폭력적인 성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말이다.

이진아 세종리더십 개발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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