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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는 부리나케 목욕탕으로 향한다. 뜨거운 탕에 여유 있게 몸을 푹 담그려면 오가는 시간이라도 좀 아끼는 게 좋을 것 같아 서두른 것이었다. 다른 때와 달리 목욕탕 매표소 앞에 몇 사람이 모여 서있는 것이 먼발치에서도 보였다.

가까이 가니 큰소리가 한창이다. “아니, 나는 언제나 3000원씩에 목욕을 했다니까!” “할머니, 그럴리가 없어요. 어른은 누구나 3500원이에요. 그렇게 억지를 부리시면 어떻게 해요” “무슨 말이야. 경로우대라는 것도 있잖아!” “우리 목욕탕은 그런 것 없으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 싸게 해 주는 데로 가세요” “그걸 말이라고 해?”

결국 목소리 큰 할머니의 승리! 3000원을 내고 표를 한 장 받아든 할머니가 목욕탕 안으로 사라지자 얼굴이 빨개진 목욕탕 주인이 숨을 고르느라 애를 쓴다. 여느 때는 웃음 띤 얼굴로 상냥하게 인사하며 맞아주던 아줌마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조그마한 창문 안쪽으로 돈을 내밀며 “할머니가 목욕 요금 깎아달라고 막무가내로 고집 부리셨나 보지요?” 그제야 얼굴을 들고 한숨을 내쉬더니 하소연을 한다. “우리도 경기가 좋으면 할머니들 목욕비 조금 덜 받아서 안 될 것도 없지요. 요즘 워낙 팍팍한데 다짜고짜 큰 소리로 밀어붙이니까 화도 나고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를 냈지요, 뭐…”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긴 했지만 구청 같은 곳에서 주관을 해 음식점이나 목욕탕, 이발소, 미장원, 안경점, 약국 등의 신청을 받아 어르신들께 일정 금액을 할인해 주는 사업이 한때 활발했었다. 물론 요즘도 내가 미처 알지 못해서 그렇지, 지속적으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취지에 공감을 해서 참여한 업체들에 대한 혜택 혹은 유형·무형의 보상일 것이다. 내 부모님을 모시듯이 지역사회의 어르신들을 섬긴다는 좋은 뜻이야 알지만,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면 당장 현금이 들어오는데 그것을 포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소노 아야코는 '계로록(戒老錄)'(우리나라에서는 '행복한 노년을 위하여' 혹은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됨)에서 일찌감치 “노인이라는 것은 직함도 자격도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앞으로 노인인구가 점점 더 많아지는데 노인인 것이 직함이나 자격으로 통용될리 없으며, 따라서 노인이니까 양보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으스대도 좋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립하려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정신의 젊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 곁에 한 끼 식사를 걱정하는 어르신이 계시면 배고프지 않도록 보살펴드려야 하고,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시면 마음놓고 치료를 받도록 도움을 드려야 한다. 당신 한 몸 누일 곳 없어 이리저리 헤매 다니는 분께는 쉴 곳을 제공해야 하며, 또한 밥걱정 없고 몸도 건강하지만 할 일이 없어 무료해 하시면 즐겁고 보람있는 일을 하시도록 프로그램을 만들고 거기에 참여하시도록 안내해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어르신들께서 노인이니까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아침에 목욕탕에서 노인이니까 '당연히' 깎아줘야 하지 않느냐고 하시던 그 어르신 역시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며 막무가내로 요구해서는 안될 일이었던 것이다. 배려와 혜택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내가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르신에 대한 배려와 혜택'이 '노인에 대한 동정'으로 바뀌는 것은 어르신과 자녀 세대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경/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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