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나무는 여전히

나무이고, 사람들은 예전 그대로

이고 당신도 변함이 없다.

당신은 예전마냥 변덕스럽고,

화를 못 이기기도 하며, 지혜로운 만큼

어리석게 굴기도 할 것이다. 단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만물을 보는 당신의 눈이다.

-앤서니 드 멜로의 '바다로 간 소금인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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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게 웃는 노인여성, 활기차게 출근길에 나선 직장여성들, 그리고 유모차를 끌고가며 정담을 나누는 여성들. 2004년 여성 삶의 현장이다.

80년대 말 진로 변경을 고민하면서 '여성학'에도 잠시 눈을 돌린 적이 있다. 이때 귀에 딱 들어온 구절이 바로 '삶의 여성학'이었다. 아니, 소위 '학'이란 데 '삶'이 붙는다니,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여성학이 다른 학문들과 남다른 노선과 딜레마를 가지고 있고, 여성학을 하려면 다른 학문과는 차별화된 아카데믹한 취향과 의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페미니스트 저널에서 일하면서도 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저널은 저널인데, 뭔가 다른 저널과 확연히 구별되는 경계가 있다는.

여성학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열린 추계 학술대회의 주제는 우연치 않게도 평소 고민해오던 '차이'에 주목해 이 차이가 빚어내는 정치적 메커니즘과 그것의 현실 반영을 세대, 지역, 가족, 민족 등 다양한 범주에서 다루고 있다. 이를 좀 더 좁혀 가정과 일, 두 개의 축을 오가는 여성 삶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독자들이 이를 읽으면서 “너무 '학'적 아니냐” 하면서도 “어, 잘 읽어보니 내 삶과도 통하는데”하는 공감을 얻기를 바라며. 여성학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페미니스트 저널을 접했다고 해서 세상이 일순간 180도 달라지지는 않는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세상을 보는 기존 시각의 변화일 것이고, 이를 통해 어느 애니메이션에 자못 감동적으로 흘러나왔던 '전혀 새로운 세상'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앞에 곧장 펼쳐질 것이다. 누군가는 한마디로 요약해 말할 것이다. 세계관과 인생관이 변했다고. 그러면서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떤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느냐는 나의 선택과 의지가 얼마만큼 중요한지를.

여기에 '참여'와 '실천'이란 두 개의 키워드를 덧붙인다.

박이은경 편집국장pl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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