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독서가 취미가 아니었다면 중년에 10년 동안의 전업주부에서 학생으로 변신하는 데 훨씬 애를 먹었을 것…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집 밖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던 그 때 자칫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었던 나를 구원해준 건 소설책들이었다

“취미가 뭡니까?” “네, 제 취미는 독서와 영화감상이에요”

요즘도 그런가. 왜 옛날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그렇게들 상대방의 취미가 뭐냐고들 물어댔나 모르겠다. 아마도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는 데는 그 질문처럼 무해 무익한 것도 없다는 데 합의가 되었던 모양이다.

우리 또래는 거의 다 취미가 독서였다(더 정확히는 취미가 독서라고들 대답했다). 일단 독서가 제일 앞장서고 그 다음에 영화감상 또는 뜨개질 따위가 그 뒤를 따랐다. 때로는 사색이 취미라는 이들도 드물지 않았다. 요즘처럼 여행이 취미가 되기에는 어림없었다. 어디 다닐 데가 있어야지, 게다가 여자인 주제에(아, 다른 건 아쉽지 않은데, 단 하나, 여행에 관한 한! 한 20, 30년 젊었으면 좋겠다. 마구 싸돌아다니게. 물론 우리 어머니 세대에 비하면 그나마 황송한 편이지만).

아무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난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다. 마침 그 때 한 분밖에 안 계시는 이모가 내가 살던 충청도의 한 면소재지에서 조그마한 책방을 열었던 덕분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다 보니 좋은 책 나쁜 책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어린 나이에 소위 음란서적에 속하는 책도 꽤 읽었던 것 같다. ‘벌레 먹은 장미’인가 하는 제목도 기억난다.

그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잡학박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물론 무식한(?) 또래들을 한껏 우습게 보는 건방기도 그 때부터 고질병이 되어 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사춘기 시절 독서는 그저 취미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전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세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던 변두리 출신의 촌뜨기가 그 화려한 또래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만약에 독서가 취미가 아니었다면 중년에 10년 동안의 전업주부에서 학생으로 변신하는 데 훨씬 애를 먹었을 거다.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 집 밖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던 그 때 자칫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었던 나를 구원해준 건 책들, 정확히 말해서 소설책들이었다. 보브와르의 ‘위기의 여자’를 읽으면서 경험했던 감정이입은 정말 대단했다. 또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를 읽고는 갑자기 원어로 읽고 싶다는 영문 모를 욕구가 솟구쳐 영문판까지 구입했다. 물론 몇 페이지 읽고는 이내 포기했지만.

다시 공부를 시작한 후 20년 동안 독서는 더 이상 취미가 되지 못했다. 독서는 과제일 뿐이었다. 공부에 필요한 책들을 수없이 읽어냈지만 난 늘 목이 말랐다. 언제 맘껏 독서를 해보나.

드디어 그 시간이 왔다. 5년 전 몸이 안 좋아진 걸 계기로 일을 대폭 줄이자 시간이 널널해졌다. 이제 맘껏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난 그토록 나를 기다려 준 책들에게 배신을 때리고 있으니.

하루에 꼬박 세 시간 이상을 나는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인터넷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는 게 어느 새 새로운 취미로 부상한 거다. 읽다 보면 그게 그거인 뉴스들을 매체마다 빠짐없이 섭렵하고 때로는 유머와 만화까지 쭈루룩 훑고 다닌다(눈에 번쩍 뜨이는 유머를 발견할 때는 나중에 써먹어야지 마음먹지만 당연히 1초 후면 다 잊어버린다).

모두들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이 가을, 다 읽어낸 책이 겨우 4권에 불과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발견하고 난 스스로 놀라고 있다. 이러고도 독서가 취미예요하고 말할 자격이 있나? 게다가 요즘은 나 스스로도 가끔씩 작가라고 불리기도 하잖아. 출판시장이 힘들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군.

집안을 둘러보니 여기저기에 읽다 만 책들이 널려 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엎어져 있는 책도 한두 권이 아니다. 겨울에는 그들을 꼭 다 읽어 주리라 약속하면서 이번 가을에 다 읽어낸 책들을 다시 펼쳐 보니 마음이 금세 넉넉해진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비밀노트’, 텐진 파모의 ‘마음공부’, 천운영의 ‘명랑’, 그리고 루이제 린저를 비롯해 열 두명의 작가가 쓴 ‘그녀들의 메르헨’.

앗, 그런데, 또 한 번 놀라운 사실! 책 쓴 이들이 모두 여성이잖아!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