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 여성단체 주최로 고령화 사회에서 여성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필요한 일은 무엇이며 그 전망은 어떤지 이야기하는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겪은 일이다. 행사장 앞쪽 책상 위에는 주제 강연을 할 교수와 패널토의에 참여할 보건복지부·여성부의 관계 공무원, 고령화 관련 대통령 자문기구의 실무자, 복지현장의 전문가, 여성단체와 노인단체 대표 이름이 쓰인 명패가 죽 놓여있었다. 다들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알만한 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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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앉으려고 미리 도착해 보니 패널 중 한 분인 모 여성상담소 Y소장이 일찍 와 계신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날 두 번째로 뵙는 분이었기에 다가가 다시 한번 나를 소개하고 인사를 드렸다. 반가워하시던 그 분은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서시던 한 여성노인단체의 K대표 쪽으로 나를 데리고 가 소개를 해주셨다. K대표는 워낙 유명하셔서 그분은 나를 몰라도 나는 이미 그분을 알고 있었고, 연세도 많으신 분이기에 나름대로 최대한의 예를 갖춰 명함과 함께 인사를 드렸다.

옆에 계시던 Y소장께서 “노년 관련 책도 쓰고, 젊지만 일찍부터 노인복지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서 “K대표도 유경 씨 책 한번 읽어봐, 나도 사서 읽었더니 좋더라!” 하시며 나를 거들어주신다. 내 인사를 받은 K대표께서 '그러냐, 반갑다, 열심히 해라'정도의 격려 말씀만 해주셨더라도 나는 기분 좋게 감사 드리며 물러났을 것을, 딱 부러지게 한 말씀하신다. “아이고, 신문에 소개된 좋은 책 메모해둔 것도 다 못 읽어. 책 보내주면 또 모를까, 내가 그걸 사서 읽을 새가 어디 있어?”

인사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머쓱해진 나는 만나뵈어서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심포지엄은 고령화 사회에서 이제는 제도적으로 여성이 생애 전체를 통해 겪어온 불평등을 해소하고, 양성 평등적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성인지적 관점'에서 노인 관련 예산과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막을 내렸다. 평소 '노인문제는 곧 여성노인의 문제!'라고 생각해 왔기에 그날의 심포지엄은 내게 아주 유익했다.

그러나 내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생각 하나는 전문직 여성에서 이제는 여성노인단체의 대표가 되신 K대표의 태도와 말씀이었다. 올해 일흔 다섯 연세에 그 정도의 자리에 계신다면 분명 동년배 여성 어르신 가운데서도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일 테고, 공직 생활을 하셨다니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서도 많은 이해와 경험을 가지고 계실 것이다. 물론 나와는 초면으로 나에 대해 전혀 모르긴 했겠지만, 당신보다 30년 후배인 내게 선배로서 또 어르신으로서 덕담을 하고 격려를 해주시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가 잘 늙는 방법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눈에 보이는 돈이나 지위, 힘으로 무엇을 이루고 앞장서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긍정적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노년일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름 있고 많이 가진 사람만이 이런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지만 나름의 지혜를 가지고 뒤따라오는 후배들에게, 후손들에게 얼마든지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은 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노년의 원숙함으로 젊은 사람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는 일,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잘 익은 열매처럼 잘 익은 노년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잘 배운 하루였다.

유경/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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