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순천역 플랫폼에 내려선 나그네 주위로 삽시간에 바다냄새가 몰려든다.

서늘하면서 짜고 비린 공기의 흐름은 다짜고짜 낯선 이방인을 포박해

갈대숲이 우거진 순천만 대대포구로 끌고 간다.

갈대와 갯벌이 어우러진 겨울철새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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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의 갈대숲은 게, 꼬막, 짱뚱어 등의 삶터인 갯벌을 정화해주고 흑두루미, 저어새, 청둥오리와 같은 겨울 철새들에겐 풍부한 먹이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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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주민들이 직접 살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조선시대 관아와 초가 등 토속적인 민속경관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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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유명하다.

대대포구의 초입엔 '철새들의 낙원, 순천만'이라는 큰 입간판과 함께 자연생태공원이 들어서 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문화유산만은 아니므로 먼저 안내센터에 들러 순천만의 갈대숲, 갯벌, 겨울철새에 대해 살펴봤다. 장장 5.5㎞에 이르는 순천만의 갈대숲은 게, 꼬막, 짱뚱어 등의 삶터인 갯벌을 정화해주고 흑두루미, 저어새, 청둥오리와 같은 겨울철새들에겐 풍부한 먹이를 제공한단다. 나는 기본사항만 주섬주섬 챙긴 다음 얼른 안내센터를 나와 포구로 이어지는 논두렁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대포구는 떠들썩한 어시장과 연안에 정박 중인 배들로 대변되는 여느 포구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구석이 있다. 살짝 낯을 붉힌 석양이 백운산 중턱에 숨어 고개만 내민 채 비춰 주는 마을과 논밭의 풍경은 밀레의 '만종'만큼이나 고즈넉하고 서정적이다. 추수가 끝난 빈 논에는 빛바랜 짚단들이 가지런히 포개져 있고 그 위론 기러기 떼가 한가로이 벼이삭을 주워 먹는 중이다.

저만치 보이던 방죽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무계단을 밟으며 천천히 방죽에 올라선 나는 그만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갈대숲이 시야를 엄습한 것이다. 키 높이로 웃자란 줄기와 억세게 돋아난 파란 잎들이 저들끼리 서걱대며 몸을 비비는 광경은 보는 사람의 마음자리를 한없이 침잠케 한다. 그것은 마치 어디서고 환영받지 못하며 떠돌던 외로운 영혼들이 이 황량한 갯벌에 이르러 비로소 안식과 소통을 누리는 듯하여 애처롭기까지 하다. 반대편으론 썰물에 쓸려 내려간 희뿌연 바다가 마지막 햇살의 잔영을 뿌리며 일렁이고 있다. 갯벌은 만을 에워싼 산과 언덕으로 인해 시골 아낙네처럼 소박하고 수줍은 모습이다.

이윽고 순천만의 황혼이 차가운 숨을 몰아쉬기 시작할 무렵 귀가 아릴만큼 서걱대는 갈대숲 사이로 '끼유우∼'하는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새 울음소리가 맞는 것일까? 한편으로 그것은 지상의 소리가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무작정 그 소리를 따라가 보기로 하고 떠돌이 망령처럼 갈대숲 한가운데로 발걸음을 옮겼다. 갈대숲과 산자락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러 찾아낸 키 작은 그림자. 그것은 날개가 부러진 채 무리로부터 이탈한 한 마리 기러기였다.

생으로의 귀환, 그리고 조용히 빛나는 아침풍경

상처 입은 녀석의 모습에 연민을 느낀 걸까? 나는 새를 품에 안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방을 가로막고 있는 어둠의 장막. 도처에서 피어오르는 짙푸른 안개. 갈대숲은 나도 모르는 새 미로로 변해있었고, 감각을 상실한 불안에 사로잡힌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비틀비틀 손으로 땅을 짚어가며 더듬어 나간 끝에 가까스로 닿은 방죽. 뒤를 돌아보니 갈대숲도, 바다도, 갯벌도 안개 속에 잠겨있다. 그렇구나. 여기가 바로 무진(霧津), 안개나루로구나.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

가슴에 품고 있던 상처 입은 새는 미세한 떨림만 여운으로 남긴 채 깊은 안식을 취한 지 오래다. 땅을 깊숙이 판 다음 새를 고이 묻자 낯가림을 모르는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 나를 빤히 쳐다봤다. 떨리던 몸과 마음이 차츰 졸음에 겨워 휘청거리더니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한 줄기 바람이 뺨을 스치는 기운에 눈을 떠보니 익명의 기러기 떼가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동녘 산자락을 타고 여명이 밝아오는 어스름 새벽이다. 때마침 갈대숲을 구렁이처럼 휘감고 있던 안개가 앞다퉈 허공을 향해 치솟는다. 방죽을 따라 인안교까지 걸어 내려가자 비로소 해가 산정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개가 지상에 내려앉은 온갖 찌꺼기를 머금고 사라졌기 때문일까. 처음으로 맞는 남해의 일출은 티 없이 말간 느낌이다. 아침햇살에 황금빛으로 물든 갈대숲, 더할 나위 없이 청량한 아침공기, 집집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긋한 밥 냄새.

조용히 빛나는 자태는 미로를 통과하고 나서야 보이는 법. 사람에 대한 꿈을 완전히 끝냈다며 쉼 없이 도망치던 누군가도 이제 그 고통을 신의 몫으로 돌릴 때가 된 모양이다. 나그네의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논두렁에 드문드문 피어있는 철 지난 칠면초가 한들거리며 작별인사를 고해왔다.

글·권경률(월간 여행에세이 편집장)

사진·강성철

가볼만한 곳

●낙안읍성/낙안온천:낙안읍성은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주민들이 직접 살고 있는 민속마을이다. 조선시대 관아와 초가 등 토속적인 민속경관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천연염색 등 다채로운 전통체험도 맛볼 수 있다. 민속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금전산 중턱에는 중탄산나트륨 수질을 자랑하는 낙안온천이 여행객을 유혹한다.

●송광사/선암사:송광사는 16국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절집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 국내외에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송광사와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선암사는 태고종의 총본산으로 유명하다.

●주암호/고인돌공원:주암호는 4억5000만t의 저수량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호수로 광주, 전남 지역의 생활용수를 대는 젖줄이다. 주암호변 1만7000여평 부지에 조성된 고인돌공원에선 선사시대의 고인돌군 뿐만 아니라 구석기 집터와 움집 등을 구경할 수 있다.

●방원공룡박물관:순천의 옛 초등학교 건물을 사용해 각종 공룡화석과 공룡모형 등을 전시한 방원공룡박물관도 청소년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김동섭 한국운석광물연구소 소장이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추천 여행코스

●당일코스:순천만→상사호→선암사→낙안읍성→낙안온천

●양일코스:순천만→선암사→송광사→(순천시내 1박)→낙안읍성→낙안온천 →상사호

●학습코스:고인돌공원→낙안읍성→방원공룡박물관→순천만→(청소년수련소 1박)

●드라이브:낙안읍성→선암사→상사호→순천만

여행 길잡이

●승용차:호남고속도로 순천나들목에서 빠져나와 1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가 월전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순천만이다.

●대중교통:서울역에서 순천역까지 철도(전라선)를 이용해 5시간 걸린다(새마을호 기준). 순천역에 내린 다음 순천만은 66/67번 버스를, 낙안읍성은 16/63/68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문의사항:순천시 문화관광과(061-749-3328), 낙안읍성민속마을(061-749-3347), 고인돌공원(061-755-8363), 방원공룡박물관(061-742-4590), 청소년수련소(061-755-6297), 순천역(061-1544-7788), 순천버스터미널(061-744-8877)

홈페이지 www.suncheon.jeonnam.kr/tourism

맛있는 집

●일억조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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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에서는 남해의 별미를 두루 맛볼 수 있는 한정식이 제격이다. 벌교 꼬막무침, 영암 연포탕, 고흥 굴전, 흑산도 홍탁삼합, 목포 장어구이 등을 두루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순천의 새끼돼지요리 애저를 더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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