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현재 가임 여성이 일생 동안 낳는 평균 자녀 합계출산율이 1.19명으로 세계적(?)인 저출산율 나라가 되어버린 우리나라 현실의 그 이면에는 형법으로 엄격히 낙태를 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낙태가 자행되는 또 다른 부조리가 존재한다.

저출산율 위기와 높은 낙태율이라는 한국 사회의 모순된 명암이 뚜렷한 가운데 법학자들 사이에서 낙태죄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낙태에 대한 찬반 논의 자체가 암묵적으로 터부시돼 왔고 여성운동권에서조차 공식적으로 언급하길 꺼려왔던 상황에서 낙태에 대한 법적 담론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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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월'에서 임신 사실을 알고 낙태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여주인공. 최근 국내 법학계에서 낙태죄 실효성과 여성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미국의 경우 19세기 초, 위험한 낙태관행으로부터 여성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낙태금지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불법낙태로 인한 여성 사망자 수가 증가하자 73년 연방대법원은 낙태여부를 결정할 여성의 권리가 헌법상의 프라이버시권리영역에 포함됨을 선언하며 낙태는 합법화됐다. 이처럼 미국의 경우에는 사법부가 주도적으로 낙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법적 방안을 제시해 왔다. 특히 헌법상 프라이버시 권리를 여성의 낙태권에 중요한 법적 근거로 제시해 이를 기초로 다양한 낙태절차나 공적자금규제 문제의 위헌성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요즘에서야 낙태죄에 대한 법적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서울대 공익인권법연구센터 낙태죄 실효성 묻는 학술회의 개최

11월 3일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연구센터는 낙태죄와 여성의 재생산권을 새롭게 조명하는 학술회의 '낙태죄에서 재생산권으로'를 개최, 법의 시각에서 낙태와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를 시도했다. 특히 임신, 낙태, 출산, 양육에 있어 1차적 주체인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이 낙태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낙태죄의 실효성은 존재하는지가 쟁점이었다.

이번 학술회의를 준비한 서울대 법학부의 양현아 교수는 “낙태 관련 법률 자체가 여성 현실과 괴리돼 있다. 우리 나라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미혼의 출산이 터부시되고 빈곤 등의 이유로 인해 일방적으로 낙태를 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이제는 법학계에서 부당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낙태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합법적 낙태의 경우 배우자 동의 필요” 조항의 가부장성 비판

한림대학교 법학부 이인영 교수는 이날 발표한 '성통합적 관점에서의 낙태죄의 현실분석과 재구성을 위한 논의'에서 “우리 사회에 낙태 현상이 만연돼 있다고 해서 그로부터 낙태죄의 폐지라는 결론을 쉽게 도출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해당 구성요건의 존폐를 논하기 위해서는 “법규정이 처벌대상으로 하는 행위가 사회발전에 위법하지 않고 처벌 자체가 무가치할 뿐 아니라 사회정의에 위반될 정도일 때”라는 주장으로 낙태죄 폐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반론을 폈다. 하지만 이 교수는 2003년에 실시한 일반국민의 낙태에 대한 인식도 조사결과 등을 통해 낙태를 허용하는 국민의식이 법보다 앞서감을 지적하면서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낙태를 규율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법률 개선의무의 이행을 논의해야 할 시점”임을 제안했다. 또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명시돼 있는 '합법적 낙태의 경우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에 대해서 가부장제의 유물이라고 지적했다.

“낙태는 여성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여성삶과 밀접”…

'여성의 재생산권에서 본 낙태와 모자보건정책'을 발제한 동국대 조영미 강사(여성학)는 “여성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낙태는 지금껏 인구조절 차원에서 관심을 갖거나 생명윤리 혹은 성도덕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낙태를 선택하고 경험하는 여성의 권리나 이해는 거의 인정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낙태는 여성의 몸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여성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낙태는 여성의 재생산권의 관점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구정책 중심의 낙태정책, 임신 예방과 유산 후 보건서비스로 대체돼야

조 강사는 “임신, 출산, 낙태, 양육의 문제는 여성의 생물학적 특수성이라는 점과 그것이 사회적 차원에서 여성에게 의무화됐다는 점,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낙태 여부는 여성의 이해를 중심으로 결정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한편 “인구 정책 중심의 낙태 정책이 여성들의 재생산건강권 확보에 큰 장애”였다며 “이젠 여성 재생산건강권 차원에서 낙태를 다뤄야 하며 연령과 계급을 초월해 모든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할 수 있고 유산 후 간호 및 가족계획 서비스가 제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정림 기자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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