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여성신문의 방향정립과 여성문제의 쟁점화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거듭되곤 했지만, 회의 끝은 항상 재정문제에 대한 걱정, 기자들에 대한 안쓰러움, 그리고 경영인에 대한 연민으로 마무리되었다…

얼마 전 한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십여 년간 잊고 살았던 반가운 얼굴이 여럿 보였다. 그들은 내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재빨리 확인하더니, 아∼ 여성신문으로 돌아가셨군요라며 인사를 했다. 그날따라 안내창구에서 소속을 물었고, 그런 질문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얼결에 “여성신문”이라고 대답했다. 마침 전날 늦은 밤까지 편집회의를 했기 때문에 일종의 소속감 비슷한 것이 남았었나 보다.

아니, 여성신문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그 동안 쭉 여성신문 편집위원이 아닌 적이 없었어요라고 황급히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난 기분이 좀 미묘했다. 창간 준비부터 이날까지 16년 동안이나 줄곧 여성신문에 관여해 오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여성신문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건 왜일까. 어쩌면 나의 처세술 탓이 아닐까.

맞다. 젊었던 시절의 몇 년을 빼놓고 난 한 번도 무슨 조직에 두 발을 담은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것에도 매이기 싫었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면 결혼생활을 34년이나 지속해 온 건 정말 불가사의다). 아무튼 다시 사회활동을 하기 시작해서 지난 20년 동안 왕성한 호기심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지만 언제나 언저리만 더듬었을 뿐 중심으로 풍덩 빠져든 적이 없다. 간혹 중심으로 끌려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신호가 감지되면 난 거의 본능적으로 뒷걸음을 치곤 했다.

하지만 한 번 준 마음을 쉽게 거둬들이진 못한다. 정이랄까 미련이랄까. 아이들 말에 따르면 도무지 쿨 하지 못한 성격이라 발 하나는 어정쩡하게 담은 채다. '또 하나의 문화'(또문)를 그렇게 꼭 20년째 어슬렁거리고 있고, '여성신문'에 한 쪽 발을 담은 지도 어느새 16년이 지났다. '또문'이야 동인들의 모임인 만큼 언제나 가벼운 마음으로 끼어 놀면 되는 대신, 여성신문은 여성운동의 차원에서 출발했지만 어디까지나 기업체인 만큼 한해 한해의 역사가 참으로 지난했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조차 늘 힘겨웠다.

여성학 공부를 마치자마자 마치 여성해방, 양성평등의 전도사인양 전국을 무대로 말하고 쓰는 데 에너지를 태우던 16년 전, 나는 여성주의적 매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여성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중요한 이슈들이 기존 대중매체에서는 단지 사소한 흥밋거리로 취급되는 관행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기존 매체에서 구색으로 갖춰 놓은 여성란이나 생활란에 갇힌 여성들을 넓은 세상으로 풀어놓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나를 들쑤셔댔다.

마침 그때 나보다 훨씬 앞서 여성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국민주를 모아 여성정론지를 만들기로 기획하고 있었고, 총책임은 이계경 사장에게 떨어졌다. 나는 창간준비호부터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던 당시의 흥분과 기쁨이라니. 게다가 신문사의 위치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겨우 5분 거리였다!

편집위원회는 1주일에 한 번씩 열렸지만 초대 주간이었던 고 정희 시인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불러냈다. 어떨 때는 사설을, 어떨 때는 인생상담을, 어떨 때는 기획기사를 떠맡은 나는 한마디로 전천후 대기조였다. 한국에서 바쁘기로 치면 상위 0.05%에 속할 여성들이 편집위원회의에 참 열심히도 참여했다. 조형, 장필화, 차미례, 신희은, 이은영 선생 등이 초창기 편집위원들이었다.

초기에는 기획이나 경영에서 날이면 날마다 문제가 발생했고, 비상대책위원회가 쉼 없이 구성되었다. 가깝다는 이유로 그런 회의는 대략 우리 집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에서 우리 집의 첫 번째 입시생(90학번)이 살아남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신문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또 나 역시 점점 바빠지면서 편집위원의 역할은 대폭 줄어들었으나 90년대 초반 중국에 1년 동안 가 있던 기간을 빼놓곤 난 편집위원회가 열릴 때면 빠짐없이 불려 다녔다. 여성신문의 방향 정립과 여성문제의 쟁점화를 놓고 치열한 토론이 거듭되곤 했지만, 회의 끝은 항상 재정문제에 대한 걱정, 기자들에 대한 안쓰러움, 그리고 경영인에 대한 연민으로 마무리되었다. 여성신문을 제대로 만드는 데 돈이 다는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돈은 점점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어갔다.

그러나 겹겹의 위기를 뚫고 여성신문은 싱싱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여성신문의 역사와 더불어 완고하기만 했던 성차별의 벽은 조금씩 깨져갔다. 우리의 미래는 이제 온전히 여성들에게 달려 있다는 믿음을 부정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난 여성신문을 사랑한다. 16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쭈∼욱 그럴 거다(참, 얼마 전에 드디어 편집위원에서 편집위원장으로 승진했다우. 기자에서 발행인으로 승진한 김효선 사장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그래도 이 불황에 그게 어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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