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해체시대 쏟아지는 가족 담론들

미래지향적 역할모델로 '아버지혐오증' 탈출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평등을…”“이방인보다 가족구성원으로 남고파”

가사와 육아분담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평등남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평등남편군은 가부장제에 기초한 기존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혐오증'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평등남편으로의 선택엔 사회적 손해가 전제돼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가사와 육아분담을 위해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출세의 기반이 될 조찬, 저녁 회식 모임 등을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되기 때문.

평등남편군의 한 사람인 이승주(37·변호사)씨는 “평등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오상민(40·방송국엔지니어)씨는 “이방인으로 살기보다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가족 구성원으로 할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단언했다.

이처럼 성공을 위해 가족 내 이방인이 되기보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행복을 선택하는 남편들이 가까운 미래 평등남편의 역할모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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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과의 거리감을 표시한 지도.

위의 가족 지도를 붉은 색으로 표시된 지시에 따라 자르고 접어 끼우면 옆의 가족 이미지가 된다.

지도를 자르고 접고 끼우는 행위는 가족이 같이 살기위해 감수해야 하는 희생을 의미한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이봉근)

'가족은 동화다'-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윤세현, 연세대 교육3)

“강남 가족은 애완견이 없으면 해체되고, 강북 가족은 TV가 없으면 해체된다”는 말이 화제다. 강남과 강북이라는 지역 이분법적 내용 때문이 아니라 TV나 애완견 같은 매개물이 있지 않다면 지금의 가족은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해체시대에 여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생산되고 있는 가족담론 속에는 더 이상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적어도 근대에 생겨난 가족개념 즉, 1.성적 욕망 충족 2.사회구성원 재생산 3.정서적 안정 4.경제의 기본 단위. 위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가족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에 가족은 정말로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기존의 '정상가족'은 해체되어 개념이나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는 것이며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 맞는 가족의 개념을 새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가족사회학 수업에 참가한 65명의 학생들(연세대 20명,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45명, 하자작업장학교 5명)이 한 학기 동안 가족을 주제로 공동 수업을 진행한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낸 '있다. 없다-다시 쓰는 가족이야기'(안그라픽스)는 이 같은 시도의 대표적 사례다. 책 제목이 시사하듯 가족에 관한 기존의 통념을 허무는 새로운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 20년 뒤 미래 사회의 주축이 될 이들은 이미 가족 해체 시대임을 인지하고 '새로운 가족'에 대해 고민한다.

“가족은 공감이다”-같은 공간에서의 모든 환경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공유는 단순히 같이 소유하는 것 이상의 느낌이다. (문예진, 홍익대 시각디자인4)

개인주의가 심화된 지금, 예비 기성세대인 20대들은 이처럼 기존의 가족 울타리에서 탈출하길 열망한다. 그리고 탈출의 주 이유는 가족제도 속에 뿌리박힌 가부장제에 대한 혐오다. 개인을 얽매는 가족 울타리 중에서 가장 화두가 되는 것은 바로 아빠의 존재다. '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에 '아 유 레디'라는 글을 기고한 비누는 “아빠에게 도끼로 맞을 뻔한 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은 집이란 걸 알게 되었고 집을 떠나기로 했다”고 했으며 '할머니의 꽃밭'을 쓴 얌체공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늙어가는 남자들은 심술을 부리며 점점 마주치면 피곤한 존재가 되어가고 자주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있다. 없다-다시 쓰는 가족이야기'에서 진명은(연세대 경제4)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가족은 국민연금제도이다”-싫어도 어쩔 수 없이 가입된 보험이니까. (한승조, 연세대 인문학부3)

하자작업장학교의 시빈은 '있다. 없다-다시 쓰는 가족이야기'에서 “가족이란 단어는 곧 공동체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누군가(가족)에게 얽매이고 서로를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길 끊임없이 요구받는 것”이라며 “그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의 이재경 교수는 “가족 성원의 개별적 욕구가 존중되고 그들의 선택이 반영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적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가족의 이름으로' 중)

지난 여름 출간된 '또 하나의 문화'의 열 일곱 번째 동인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의 주제 역시 '가족'이었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갈 현실적이고 대안적인 키워드는 바로 '누구와, 어떻게 사느냐'라는 것이다. 연대 사회학과의 조한혜정 교수도 “미래 가족은 다양한 형태의 식구나 주거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정림 기자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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