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때로 과학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들을 뒤늦게 밝혀 준다. 며칠 전 신문에는 커피가 중독성이 강한 식품이라는, 지극히 새롭지 않은 뉴스가 실렸다. 아니,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은 조금만 마셔도 중독되기 때문에 안 마시면 불안 두통 우울증 같은 증상이 나타나므로 커피도 마약과 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이런. 이쯤 되면 호들갑이다. 하긴 요즘엔 뭐든지 오버를 해야 눈에 띄긴 하지.

바로 얼마 전에는 커피를 하루에 한두 잔 마시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는, 조금은 놀라운 기사를 보았다. 그보다 몇 달 전에는 정반대의 기사가 나왔었는데 혹시 그 동안 커피회사에서 맹렬하게 로비를 한 건 아닌가. 음모설이 판치는 시대를 살다 보니 매사가 미심쩍게 보인다.

커피가 몸에 좋건 안 좋건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몸이 안 좋으면 몸에서 커피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뭐 대단한 과학적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몸이 그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으면 제사상에 커피와 맥주를 올려놓겠다고 언젠가 아이들이 약속한 적이 있다. 아주 어린 시절이라 그 애들은 지금 잊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일에는 기억력이 별로 신통치 않은 난 그 말만은 단단히 기억하고 있다. 만약 나 죽은 다음 제사상에 커피와 맥주가 안 보이면 내 혼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도 장담 못하겠다. 차라리 제사를 안 지낸다면 몰라도.

커피라는 말을 알기도 전에 나는 커피 맛을 봤다. 그러니까 물경 반백년 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난 십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 논둑길을 지나 신작로를 걷다 보면 가끔 미군들이 지프를 타고 지나갔다. '기부미 쪼꼬렛'이라고 외치며 우리가 뒤를 따라 달려가면 코 큰 병사들은 초콜릿이니 사탕을 던져 주었다. 가끔은 레이션 박스를 통째로 던져 주기도 했다.

그 레이션박스에는 아주 조그만 봉지도 있었는데 도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물이 담겨 있었다. 힘들여 봉지를 찢다 보면 새카만 가루가 손에 찐득찐득 달라붙었다. 혀로 핥았을 때의 그 쓴맛이라니. 그 때의 쓴맛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게 커피라는 걸 안 건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유난히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친구네 갔더니 잔에다 까만 물을 타서 주었다. 그걸 마시면 잠이 잘 안 와서 시험공부할 때 밤을 새울 수 있다고 했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나도 밤새우며 공부하게 커피를 사달라고 떼를 썼더니 생전 미제 물건이라곤 모르던 엄마가 영등포 시장에 가서 비싼 돈을 주고 인스턴트 커피를 사왔다. 보통 때는 아끼느라고 안 먹고 시험 때마다 커피를 몇 잔씩 타서 먹었지만 잠은 왜 그리 퍼붓던지. 오히려 따뜻한 물이 위 속에 들어오니 몸이 스르르 풀리면서 잠이 더 잘 오는 것 같았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줄곧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버는 돈의 상당액을 다방을 드나드는 데 썼다. 처음엔 커피 맛이 아니라 순전히 학교 앞에 있던 다방 분위기 때문에 드나들었는데 하도 다니다 보니 어느 결에 커피를 안 마시면 속이 불편했다. 30원 짜리 자장면을 먹고 나서는 반드시 30원 짜리 커피를 마셨다. 그 때 시커멓게 물든 속이 지금까지 지속되어 머리 속이 언제나 맑지 못하고 흐리멍덩하나 보다.

커피의 절정기는 신문사에 다니던 때였다. 광화문 한복판에 있던 신문사에는 아침부터 커피배달을 나온 인근 다방 아가씨들로 붐볐다. 입사해서 얼마 동안은 편집국에서 수습기자 생활을 했는데 고참기자들이 나보고 “아가씨, 어느 다방에서 왔어?”라고 물을 때도 있었다. (아, 나도 한때는 꽃처럼 보인 적이 있었다오)

취재를 다니면서 하루에 열 여섯 잔을 마시기도 했다. 일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하는 것 같았다.

그 후 집에서 아이 셋과 씨름하던 시절, 나는 한동안 원두커피를 갈아 알코올 램프로 내려 먹은 적도 있었다. 아수라장 같은 집안에서 뭔가 어울리지 않던 그 모습이 꽤 이색적으로 보였는지 많은 이들이 그 때의 나를 기억한다.

5년 전, 내 몸이 커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나는 그제야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병원에 갔다. 그리고 건강에 안 좋아서가 아니라 건강이 안 좋아서 한동안 커피를 못 마셨다.

이제 다시 나는 하루에 두세 잔의 커피를 마신다. 스타벅스 커피뿐만 아니라 음식점의 공짜 커피까지 어떤 종류의 커피라도 마실 때마다 난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 조그만 바람이 있다면 그저 죽을 때까지 커피가 싫어지지 않는 것.

*주:이 메일의 내용은 커피회사와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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