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없는 여자들
집에 없는 여자들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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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란/



여성학자




아주 가끔씩 만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전 9시도 채 되기 전이었으니 나로선 꽤 이른 아침이었다. 이건 또 무슨 비상사태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잡았다. 내 목소리가 들리자 친구는 용건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놀라는 눈치였다. 아이고, 어떻게 이 시간에 집에 있니?(아니, 없을 줄 알면서 전화는 왜 했는지, 참)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안 받았다고 했다. 취업한 친구들은 그러려니 했지만 전업주부 친구들도 하나같이 집 전화를 안 받아서 휴대폰으로 연락이 닿았다는 거다. 그러면서 평소 점잖던 친구는 요즘 유행한다는 유머를 전해 주었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여자들은 딱 세 종류란다. 아픈 여자거나 인간성 나쁜 여자거나 돈이 없는 여자.



글쎄, 나 자신을 돌아 보면 그 세 가지 조건이 몽땅 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것 같았다. 뭐 몸이 아픈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건강에 자신이 있는 건 아닌데다 인간성도 아주 나쁘진 않지만 썩 좋지도 않지, 돈이란 것도 없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많다고 할 수 있겠지만 또 있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애걔 고까짓 것 할 정도이니.(이게 웬 뜬금없는 고해성사? 요즘 가을을 타느라고 마음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되었나)



아무튼 요즘 주부들은 어느 나이가 되면 낮 시간에는 집에 없단다. 물론 아이들을 대여섯 이상씩 낳던 어머니세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비교적 일찍 결혼해서 두셋만 낳아 기른 내 또래 주부들과 그 이후 세대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그 어느 나이라는 건 개인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아이들이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부터 시작되어 대학입학과 더불어 절정에 달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결혼해서 손주들을 맡겨 올 경우 다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거나 아니면 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집에 있게 되는 건 아닌지.



몇 년 전 고교동창들과 단체로 해외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착실한 전업주부였던 그들의 입에서 집에만 있으면 집 멀미가 난다는 말을 듣고 그 기발한 표현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집 멀미도 주부의 직업병의 하나라는 거였다. 그때그때 치료해 주지 않으면 치명적 질병으로 발전하는.



그런데 집 멀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집을 비우는 그 수많은 중년의 여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도대체 무얼 하며 집 밖에서 그 많은 시간들을 보낼까. 친구의 유머 아닌 유머를 들으면서 새삼스레 그게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듯이 대낮에 강남의 도로가 메워지는 건 점심 먹으러 자동차를 몰고 나온 주부들 때문이라든가 주부들이 모두 쇼핑 중독자들이라 백화점이 먹고 산다는 식의 비아냥은 주부들의 외출을 무조건 못마땅하게 보는 편견의 소산이다.



대부분 주부들의 스케줄은 아주 빡빡하다. 많은 주부가 종교 활동에 시간을 쓴다. 또 문화센터나 박물관에 등록해서 취미부터 교양까지 다양한 내용들을 공부하기도 하고 헬스클럽 또는 공원에서 운동을 하는 등 심신 양면으로 자신을 가꾸는 데 쓴다. 특히 나이 들어가면서부터 건강과 친목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친구들끼리 등산클럽을 만들어 자주 산에 오르기도 하고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찜질방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또 각종 전시회장에도 끼리끼리 혹은 혼자 온 중년 주부들이 많이 보이고 조조할인 영화관에는 어김없이 주부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얼마 전 아침에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봤을 때는 관객이 총 다섯 명인가 그랬는데 나와 친구 말고도 내 또래 여성이 혼자 와서 보고 있었다.



그래, 아이들 다 키워 놓고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더 늙기 전에 맘껏 노는 것도 좋고 취미생활 하는 것도 좋지. 그러다가 가끔씩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라도 하면 금상첨화고. 그것만으로도 더 바랄 나위 없는 인생이지. 그걸 못해서 일생 아글타글 사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주부들이 얼마나 능력이 많은지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들이 이렇게만, 즉 가족과 자신만 돌보다가 인생을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면 못내 안타깝다. 나는 이제까지 주부치고 만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 주부들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어 주부도 살리고 사회도 살리는 그런 묘책이 없을까. 거, 아침부터 쓸 데 없는 걱정하지 말고 너나 잘하라고요? 아프지도 말고 인간성도 고치고 돈도 모으라고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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