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개발, 여행, 외국어 공부 등 시야 넓혀 '커리어 시프트'

전업 주부 김영희(38·가명)씨에겐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 학교에 간 오전 시간대가 황금같이 귀하다. 작가지망생인 그가 '주부''아내''어머니'의 역할을 떠나 자신만의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 그는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택한 일을 할 수 있는 '휴식 아닌 휴식'을 간절히 원한다.

여성단체활동가 이미경(37·가명)씨는 모처럼 주어진 '안식년'을 활용하기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구상 중이다. 이씨는 가사노동 하랴 단체활동하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일주일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 가족의 협조를 구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장기 계획을 세우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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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커리어를 병행하느라 치열하게 살아온 여성들은 중년 전환기에서 '이제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가' 자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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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태 기자 leephoto@>

촘촘한 가족관계 망 속에서 사회적 일까지 해내야 하는 2000년대 여성들. 요즘 이들의 '탈출'욕구가 심상치 않다. 주부, 직장인, 단체활동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안식년'을 맞는 여성들을 일별해 보자.

날마다 사건, 사고를 접하며 급변하는 한국사회에 대응해야 하고,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는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안식년은 필수. 여성단체연합, 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들은 연차에 따라 안식년을 적용, 활동가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준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정책국장은 지난 해 1월부터 11월까지 여성단체연합, 여성민우회, 참여연대 등 국내 비정부기구(NGO)들이 연대해 만든 필리핀 아시아센터에 연수를 다녀왔다. 아시아센터는 한국의 NGO들이 제3세계 NGO의 활동을 접하고 그들과 교류하기 위해 만든 곳. 여성단체 활동만 15년을 한 김 국장은 “활동가들의 지속성을 위해 안식년은 중요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나를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으로 지난 1년을 활용했다”고 전한다. 대다수 단체활동가들의 안식년은 국제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언어를 배우는 데 투자된다.

NGO 간의 국제 연대에 대한 관심이나 활동가들의 헌신성이 아무리 높아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국내 운동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김 국장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다른 시민사회의 문화를 접함으로써 다양성을 체감,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전한다. 운동에 대한 '거리두기'를 통해 그 동안 활동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단체 활동가를 떠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의 공통점이다.

직장인들에게 안식년은 또 다른 의미다. 최근 들어 안식년을 단순히 '쉼'이 아닌 '커리어 시프트(Career Shift)'의 준비기간으로 삼는 이들이 늘고 있다.

국민은행 상록수역 지점 김은희(42) 과장은 지난 해 3월 1년간 회사에서 제공되는 '리프레시(Refresh)'제도를 활용, 재충전과 자기계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휴가 기간에 공인재무설계사와 공인중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한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것.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안에서만 생활하다 밖에 나가보니 시야가 넓어지더라”며 “직장 생활 10년 이상 된 이들에게 안식년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안식년이 편치만은 않다.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고 시간이 가장 큰 자원인 현대 사회에서 개인에게 '무조건의 휴식'이 주어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현미 교수는 “노동이 불안정한 후기 근대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멀티플 커리어(Multiful Career)'가 요구되고 있다”면서 “기존의 안식년이 한 직장 혹은 단체에 오래 있게 하기 위해 일정 기간 특혜를 주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개인이 조직이나 단체의 재생산이 아닌 자기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시간적 자원으로 안식년을 활용하는 등 안식년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고 설명한다.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이화여대출판부)의 역자 김애순씨는 많은 커리어우먼들이 가족과 커리어를 동시에 삶의 핵심에 두다 30대 후반에 접어들어 사랑·결혼, 어머니 역할, 전일제 커리어를 소화해 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대가가 기대한 만큼 만족스럽지 못하고,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슈퍼우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중년의 전환기에 접어들어 '이제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을 원하는가'스스로에게 묻는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의미의 안식을 가져본 적 없는 이들에게 이제 '자기 안식년' 혹은 '자기 안식일'을 선포할 수 있는 권리를 줘야 한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임인숙 기자isim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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