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배우 주연 ‘인어공주’ 실사영화 개봉
별점 테러·인종차별적 공격까지
‘다양성’ 강조 긍정적이나
여성의 헌신·희생 낭만시하는
낡은 동화 틀 유지해 아쉬워

영화 ‘인어공주’ 스틸.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영화 ‘인어공주’ 스틸.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최고의 컨텐츠 제국, 디즈니의 세계엔 비백인 공주가 없다. 흑인만 놓고 보면? 브랜디와 휘트니 휴스턴이 출연한 뮤지컬 영화 ‘신데렐라’(1997),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2009) 정도다.

2023년, 귀한 흑인 공주가 디즈니의 세계에 등장했다. 흑인 가수 겸 배우 할리 베일리가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 주인공 ‘에리얼’이 됐다. 흰 살결, 빨간 머리, 가냘픈 몸, 커다란 눈망울이 아니다. 검은 피부, 굵게 땋아 내린 드레드락(Dreadlocks) 머리, 연약하기보다 건강해 보이는 신체를 지닌 인어공주다.

영화는 지난 5월 26일 개봉하자마자 나흘 만에 전 세계적으로 1억8580만 달러(약 2456억원)를 벌어들였다. SNS엔 흑인 아동청소년들이 자신과 닮은 디즈니 여성 주인공을 볼 수 있게 돼 좋아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도 다수 올라왔다. 베일리는 지난 25일 BBC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기뻐서)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새로운 세대를 대표할 수 있게 돼 몹시 기쁘다”고 했다. 지난 24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도 “흑인 공주를 보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더 많은 흑인 디즈니 주인공이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롭 마셜 감독은 캐스팅 단계에서 모든 인종의 배우들을 에리얼 역으로 고려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에리얼은 물론 다른 여섯 인어공주 자매들도 아시아계, 라틴계 등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배우들이 맡았다. 인간 세계의 지도자는 흑인 여왕이다. 백인인 에릭 왕자는 입양아다. 여러 인종, 젠더, 연령, 외모, 체형의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디즈니가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다양성’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에리얼의 자매 인어공주 ‘카리나’로 분한 카이사 모하마는 BBC 인터뷰에서 “마지막 장면을 촬영할 때 펑펑 울었다. 이런 일의 일부가 되기를 꿈꿨는데 이뤄졌고,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영화 ‘인어공주’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배우들.  ⓒDisney
영화 ‘인어공주’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배우들. ⓒDisney

반발도 거세다. 캐스팅, 티저가 공개될 때마다 인종차별적 공격이 쏟아지더니, 개봉하자마자 ‘별점 테러’가 벌어졌다. 30일 기준 영화 플랫폼 ‘아이엠디비’(IMDB)에서 투표에 참여한 3만여 명 중 1만3000명(39.9%)이 10점 만점에 1점을 매겼다. IMDB는 이를 ‘비정상적 투표 활동’으로 보고 “평점 시스템의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 대체 가중치 계산이 적용됐다”고 공지했다.

한국 상황도 비슷하다. 30일 기준 네이버 영화 ‘인어공주’ 평점은 10점 만점에 6.56점으로, 남성(5.02)이 여성(7.47)보다 낮은 점수를 줬다. 흑인 캐스팅 비난, 주연 배우 외모 폄하 등의 반응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연배우 베일리의 SNS에도 인종차별적 악플 테러가 이어졌다. 베일리는 여러 인터뷰에서 “흑인 여성은 일상적으로 인종차별을 겪는다”면서 “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반응에만 집중한다”고 밝혔다.

‘흑인 인어공주’에 대한 거센 반발은 198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만든 이미지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증거다. 일부 팬들은 “디즈니가 PC(정치적 올바름) 강박에 빠져 원작을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올바름은 예술적 가치와 함께 갈 수 없다’는 논리다. 그런데 애초에 인어는 신화와 전설의 생물 아닌가. ‘인어공주’는 언제나 시대의 요구와 콘텐츠 제작자의 의도대로 재해석된 존재였다.

198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Disney
1989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Disney
영화 ‘인어공주’ 스틸.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영화 ‘인어공주’ 스틸.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사실 ‘다양성’ 키워드를 빼면 영화 자체는 퍽 인상적이지 않다. 현대의 감수성에 맞게 일부 가사를 수정하고 새로운 노래 세 곡을 추가했지만, 독립된 작품으로서 원작에 버금가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이 많다. 바닷속 군무씬도 격렬한 전투씬도 이미 여러 블록버스터에서 압도적인 CG기술을 경험한 관객들의 성에 차지 않고, 에리얼의 아버지인 바다의 왕 트리톤으로 분한 스타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은 놀라울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에 ‘왕자와 공주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라는 상투적인 서사를 유지한 점도 아쉽다. 사랑에 빠져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의 이야기, 잘생기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과의 결혼이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라는 이야기는 솔직히 지루하다. 2023년 세상에 나온 ‘인어공주’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는 여성에 더 초점을 맞춘 이야기였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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