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폭력 신고했다는 이유로 전 연인 ‘보복살인’
경찰 “피해자가 분리·접근금지 원치 않아 귀가”
이수정 교수 “경찰이 사실혼 관계 고려했어야”

데이트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난 지 1시간 만에 연인을 살해한 김모(33) 씨가 28일 오후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금천구 금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난 지 1시간 만에 연인을 살해한 김모(33) 씨가 28일 오후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금천구 금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또 다시 교제폭력(데이트 폭력)을 당하던 여성이 살해당했다. ‘금천구 보복살인’은 경찰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별다른 조치 없이 내보낸 뒤 곧바로 참변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수사기관의 안일한 인식과 부실한 법·제도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교제 폭력 신고했으나 가해자 ‘그냥’ 풀어준 경찰

‘금천구 보복살인’은 지난 26일 오전 7시 17분쯤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건물 지하주차장에서 김모(33)씨가 연인관계였던 피해자 A씨에게 수차례 흉기를 휘둘러 숨지게 한 사건이다. 김씨는 지난 21일 A씨가 이별 통보를 하자, A씨 집 근처 PC방에서 숙식하며 스토킹 했다. 이후 김씨는 지난 26일 새벽 A씨를 찾아가 대화를 하자며 A씨의 팔을 3~4차례 잡아당겼다고 한다. 그러자 A씨가 오전 5시 37분 재물손괴, 폭행 등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현행범 체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김씨를 오전 6시 11분 귀가 조치했다. A씨는 이날 오전 7시 7분 피해자 조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먼저 조사를 끝내고 나와 있던 김씨가 10분 뒤인 A씨를 살해했다는 것이 경찰 조사 결과다.

가정폭력·스토킹 아니라 ‘즉시 분리’ 안 되는 교제폭력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는 두 가지다. 먼저 경찰의 초동 대처가 미흡했던 것 아니냐는 점이다. 교제폭력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김씨에게 ‘접근 금지’ 조치 등을 취하지 않았다. 금천경찰서는 지난 27일 언론브리핑에서 “A씨와 김씨 모두 ‘팔을 잡아당긴 정도’의 경미한 폭행이었다고 진술했고, A씨에게 스마트워치 지급 등 보호조치를 안내했으나 주거지 순찰만 원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데이트폭력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순간, 현행법상 적용할 수 있는 조치를 상당히 지양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며 “피해자 보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법률이 있음에도 적용을 안 하면 피해자 보호가 안 된다”고 말했다. 현행 ‘가정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은 피해자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아도 접근 금지 등을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반면, 교제폭력은 가정폭력, 스토킹과 달리 분리, 접근금지를 위한 잠정조치를 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전혀 없다. 다만, 경찰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1년 여간 동거하던 사실혼 관계였다는 점을 고려하거나 가해자의 스토킹 혐의에 집중했다면 접근 금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교제폭력 8년간 92.4% 급증… 피해자 보호 조치 없어

교제폭력은 해마다 늘고 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교제폭력 사건으로 검거된 이는 2014년 6675명에서 2022년 1만2841명으로 8년 새 92.4%나 급증했다. 교제폭력은 친밀한 관계 사이의 폭력이라는 가정폭력과 본질적으로 비슷하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행해지지만 법률적 혼인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 등의 임시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피해자를 보호할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가정폭력이나 스토킹범죄와 마찬가지로 교제폭력도 경찰이 피해자 보호를 위해 적극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미 해외에서는 분리조치 등 피해자 보호 범위를 정서적으로 ‘친밀한 파트너에 의한 폭력’인지로 폭넓게 보고 있다. 미국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경찰이 가해자를 체포하는 의무체포제를 채택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2016년부터 신체적 폭력이 없는 강요·통제만으로도 최대 5년 형이 선고되도록 법을 개정했다. 일본은 2013년부터 교제 상대도 가정폭력 가해자와 같은 법률의 적용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10일 이수정 당시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이 원희룡 정책총괄본부장과 범죄 피해자 지원제도 개선에 관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2021년 12월 10일 당시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던 이수정 경기대 교수가 원희룡 정책총괄본부장과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을 교제폭력까지 확대하겠다”는 내용의 범죄 피해자 지원제도 개선에 관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사진

“교제폭력도 가정폭력특별법 대상으로 확대하자”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 10일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을 교제폭력까지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제20대 대통령선거 국민의힘 정책공약집’에도 “교제폭력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을 교제폭력까지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법무부도 2022년 4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교제폭력에 대해 가정폭력처벌법이 적용되지 않아 접근금지조치 등 피해자 보호조치의 사각지대가 발생함에 따라 전문가 의견, 해외 입법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피해자 보호 공백을 해소할 수 있도록 국회 입법 논의를 충실히 지원하겠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이후 윤석열 정부는 권력형 성범죄·디지털 성범죄·가정폭력·교제폭력·스토킹범죄를 ‘5대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관련 법 개정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회에서도 교제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관련 법안이 발의되고 있으나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잠자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권인숙·박광온 의원은 기존의 가정폭력처벌법에 데이트폭력을 막을 근거를 마련하자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2021년 1월과 3월 각각 대표발의했다. 교제폭력에 대한 개별입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의힘 윤영석·김미애 의원은 2020년 11월, 2022년 7월 ‘데이트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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