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신학자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 강연 열려

트랜스젠더 신학자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왼쪽에서 세 번째). ⓒ최형미
트랜스젠더 신학자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왼쪽에서 세 번째). 사진=이덕희

서울시는 2015년 이후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 축제를 개최한 것 빼고 매년 허용한 서울광장 퀴어축제를 불허했다. 그날 광화문에서는 기독교관련 단체인 CTS 문화재단의 행사가 진행된다. 광화문광장의 저항과 혁명의 열기가 옅어져 가고 있다.

이런 시기에 유니온대학 정현경 교수는 트랜스젠더(FTM) 신학자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 (Robero Che Espinoza, 이하 로베르토)가 무용가 아내와 한국에 왔다고 알려왔다. 로베르토는 성직자, 학자, 활동가, 트랜스젠더 논 바이너리 남성이다. 영국인 아버지와 멕시코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딸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인종에 혼란을 겪었고 몸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표현한다. 몸과 정신의 분리를 느낀 것이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게 될 때 비로소 세상을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그는 머리로 더 많이 공부하는 데 몰입하지 않고 왜 몸까지 바꿨을까? 그 이후 그가 알게 된 것이 무엇일까? ‘차별과 혐오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의 모임(평등세상)’ 주최로 광화문 새길 문화원에서 열린 로베스토의 강연회에 참석해 강연과 질문을 정리했다.

“한국어로 소통하지 못하고 영어와 스페인어만 해서 미안합니다”

영어로 말할 때 발음이 틀릴까 봐 주눅 드는 우리에게 한국어를 못해 미안하다니. 20대에 신학과 사랑에 빠지면서 인간은 어디서 왔고, 혁명은 무엇이고 더 나은 세상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단다. 신학을 공부하며 원주민, 식민지, 젠더라는 정체성을 변주해가며 차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갔다. 그러니 영어와 스페인어라는 제국주의 언어가 아니고 한국어의 소통이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냈다.

그는 최근 매일 시에스타(짧은 낮잠)를 한다. 조상이 가르쳐준 지혜다. 이렇게 낮에 1시간 정도 컴퓨터와 떨어져 물을 마시고 명상을 한다. 비로서 몸과 마음을 연결하고 그의 뿌리와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퀴어는 정체성이 아니라 경향성

“나는 퀴어바디를 가졌다. 퀴어는 정체성이 아니라 경향(orientation)이다. 즉,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주류에 동화(assimilation)되는 것에 저항하고, 규범에 도전하며, 일상의 모습도 아니며 자연스럽다는 것에 타협하지도 않는다. 퀴어는 다른 세상이다.” 그의 퀴어바디는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한 출발점이었으며 그런 모험을 위한 용기였다.

그는 어릴때부터 기독교 문화에서 성장했고, 성직자가 되었다. 퀴어를 부정적으로 보는 기독교 교리와 막닥드리며, 그것을 뛰어넘어 퀴어의 몸으로 기독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변화하며 내가 되어가고 있으며 점점 더 다른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 혼혈이라는 인종의 불안정성과 퀴어로 인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불안정성은 내 안에서 함께 춤을 춘다.” 그의 불안정성을 버티고 뛰어넘어 강하게 살아남은 것이다.

트랜스젠더 신학자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 ⓒ최형미
트랜스젠더 신학자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 사진=평등세상

퀴어는 본질적으로 선하다

“나는 다른 가능성의 몸을 가지고 그것을 구현한다. 기독교는 다른 가능성의 세상을 펼치는 과정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교리와 도그마를 사용해서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제어해왔고 고립시켜왔다. 정통이라는 것은 제국의 승리일 뿐, 예의도 없고, 역사의 이면을 모른척했다.” 노예사냥, 식민지 확장을 정당화했던 기독교가 떠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공격을 당하는 퀴어의 몸이 되어 제국주의의 공격을 또다시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최근에 6번이나 우파 남성집단에게 공격을 당해 이사를 해야 했다. 자폐증이 있는 나는 생각과 감정사이에 연결이 어렵다. 그런 불안한 위치로 부터 세상, 인간, 정의, 국가에 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상에 대한 다른 가능성에 대한 비전을 말하고 있었다.” 퀴어는 선하다. 제국주의 전략과 권력 그리고 그것을 세습한 세상을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월주의 문화를 흔든다. 그는 다시 강하게 강조했다. “퀴어는 선하다. 주류가 만들어 놓은 규범을 파괴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선하다. 이렇게 윤리적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다. 퀴어는 용기있게 전세를 뒤집고 세상에 질문한다.” 그의 언어에서 파괴(deconstruct) 이후 펼쳐질 다른 세상이 보였다.

기독교는 규범의 종교가 아니다

듀크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로베르토는 분명하게 말한다. “도그마는 내가 믿는 종교가 아니다.” 그는 규칙과 규정은 제국주의과 종교가 교차하며 만들어졌다고 비판한다. 그것을 위반한 퀴어바디는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남은자의 몸이며 신을 향해 가는 순례자(becoming, 필자 해석)의 몸이다. 퀴어는 예수처럼 제국의 정치 구조에 위협이 되며, 규범을 넘어 평생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섰기에 위협이 되고 있다. 다음은 강연장에서 나온 문답.

-제도권 기독교가 혐오에 앞장서고 있다. 날마다 절망스럽다, 한국에서 어떤 전략을 펼쳐야 하는가? 

“나도 당신처럼 절망하고 있다. 위험과 맞닥뜨리고 있다. 교회가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믿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다른 목소리,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는 오랫동안 기독교 민족주의, 백인 민족주의를 의미했다.

첫째, 나는 그들이 가려 덮어놓았던 저변의 역사에 관심한다. 그 위 무거운 돌들을 하나 하나 치우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해방신학적 방법이며 저변신학(underside theology)을 통해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둘째, 우리에겐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함께 윤리적인 미래를 구현해야 한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타라(정현경교수)와 연결되어 있어서 함께하지 않았나? 우리의 관계는 정의를 향해가고 있다. 제국이 망했고 망한다는 것을 기억하해야 한다. 공동체를 연습하고 관계를 연습해야 한다.

셋째, 분별이 있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지금 미국정부는 18세 이하에게 젠더를 인정하고 있지 않고 돌봄도 하지 않는다. 국가가 사회와 시민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제도권이 답을 주지 못한다면 그때 공동체가 분별을 해야 한다. 분별이 있는 공동체는 파괴를 막을수 있다. 함께 갈 때(intogetherness) 우리는 뭔가 작전을 찾아낼 수 있다. 교회가 가장 좋은 곳이다. 이제것 교회는 권력을 모으는데 관심했다. 결국 파괴로 이어지지 않지 않는가?ㅜ트렌스젠더들은 매일 권리를 잃어가고 있다. 나를 살려낸 것은 공동체와의 관계였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 교류하고 함께 저녁을 먹으로 나고 이것에 관심한다. 미국에 가서도 당신이 나를 위해 싸운다고 알고 있겠다.”

-당신이 유니온대학에 왔을 때 여성이었고 당시에 우리는 함께 남성성에 관해 이야기 했다. 긍정적인 것 뿐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당신이 관심하는 남성성이란 어떤 것인가?

“내가 유니온에 갓을 때 호르몬 치료를 하지 않았을 때였다. 20여년전에 시카고에서 트렌스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나는 남성성(masculinity)에는 끌렸지만 남자다움(maleness)에는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 남성성, 여성적 남성성, 퀴어적 남성성의 가능성에 관심하고 매력을 느낀다.”

-몸까지 바꾸며 학문을 하지 않았나? 사람들은 늙었던, 뚱뚱하든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몸을 바꾸고 나서 어떤 깨달음이 있었나?

“난 내가 원하는 몸으로 바꾸었다. 난 변화를 원했다. 기독교는 변화를 요구하는 종교가 아닌가? 도마는 예수의 부활이후 그의 허리를 만지지 않았나? 처음 수술을 하고 의사가 나의 허리에 손을 넣었을 때 ‘부활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젠더는 여전히 순례(becoming) 중이다. 나는 가슴을 잘랐고, 다이어트 운동도 하며, 나의 성 정체성을 인정해주는 방법으로 바꾼 것이다.”

-퀴어는 근본적으로 선하다고하지만 지금 기독교는 독실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퀴어를 죄라고 믿는다. 그들과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가? 

“여성성이 무엇이고 남성성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상상과 관계있다. 사람들은그러한 질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제 3의 것을 상상하고 몸을 바꾸고 있다. 퀴어는 선한 것이다. 인간을 흑백논리로 한정할 수 있을까? 이분법으로 볼수 있지 않다. 퀴어는 태초부터 있었다. 단지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표현을 고쳐가는 것이 아닐까?”

-윤리는 규범화가 아닌가? 당신은 기독교 윤리와 퀴어를 어떻게 연결하는가?

“윤리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헤게모니(지배권력), 규범 가치에 관한 것이다. 규범과 가치는 사실상 반윤리적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의 윤리는 무엇인가? 부자가 되라는 것이 미국의 규범이다. 사실은 반자본주의 사회가 길이 아닌가? 나는 더 이상 규범에 관심이 없다. 몸을 통제하고 식민지를 확산하는 제국주의자들이 하는 짓이다. 퀴어는 탈식민지 이론이다. 성경을 실천하기 위해서 변두리에서부터 읽어야 한다. 더 발전하고 올라가기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남용하는 것이다.”

최형미 여성학자 사진=본인 제공
최형미 여성학자 사진=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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