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전통사회에서 보통사람들은 학교라는 것 하고는 상관없이 살았다. 글을 깨치고 학문을 하는 것은 특수층에 국한된 일이었다. 간혹 좀 깨어있는 부모들이 설혹 자기는 무식하더라도 자식은 서당이나 마을의 어른 댁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했다.

그렇다고 교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른들의 말씀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 생업에 종사하고 관혼상제의 예를 치르는 태도와 양식 모두가 다 전범이 되어 '생활 교육'이 가정과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가훈' 또는 '가풍'은 가정교육을 통해 전수되는 교육의 기본 정신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말들이었으며, 지방마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킬 것으로 아는 여러 가지 불문율이 생겨나고 그것들을 대대손손 전승시키는 방편들이 있었다.

학교교육이 공교육으로 제도화하기 시작한 것은 국민국가가 대두하고 산업화에 따른 직업의 전문화와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면서부터였다. 국가는 국가대로 지배계급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인구층이 문맹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나라가 안정되고 부강해지는 지름길임을 깨닫고 국민교육에 적극 나섰다. 그에 부응하여 시민들 개개인은 학교 교육을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구요, 입신출세의 지름길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교육은 이제 개개인의 능력이나 판단에 맡기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정치적 사안으로 부상했으며 그 중요한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겨 체계적으로 운영하여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 개개인에게 맡겨두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데 위정자들과 시민들 사이에 묵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의무교육'이라는 말은 문명국가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특히 지식기반 사회가 강조되는 오늘날에는 교육의 기회를 국민 모두에게 공정하게 보장함과 동시에 수월성을 최대한 장려하는 일은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정책 순위 제1번의 주요 과제로 자리잡았다.

사실 국가나 지방자치 기구가 시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무상으로 충족시켜줄 의무를 임하고 나서서 훌륭한 공교육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맡기기만 하면 된다. 많은 선진국들에서는 고등학교 또는 대학까지가 무상교육이고 그 대신 학생들의 진로도 자신이나 부모의 야망보다는 절대적 신뢰와 권위를 누리는 교사들의 전문가적 지도와 평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고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궁극적 책임이나 권리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재국가에서는 공교육이 국가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동원되고 학교는 그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되지만, 자유민주국가에서 학교는 교육에 대한 집행권을 위임받고 있는 것일 뿐 아이들을 어떤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을 가지고 책임을 지는 것은 역시 학부모들이다. 부모들은 항상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학부모-교사 협의회 등을 통해 학교의 운영에 참견할 수 있는 공적 통로를 확보하고 있으며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언제고 자녀들을 전학시킬 수 있는 권리를 유보하고 있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건 다른 목적이건 자기 자식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 학교에서 충실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을 때는 사적인 부담으로 과외수업을 받게 하는 사례도 없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개방된 민주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이 성행하는 것이 그리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다. 다만 그 규모가 보충수업 수준을 넘어 공교육 체계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에 대한 설명과 해소책의 실마리는 교육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파행을 거듭해온 대학 신입생 선발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개별화된 양질의 교육을 향한 국민적 욕구 및 구매력과 그러한 수준의 좋은 교육을 공급할 수 있는 공교육 체계의 가능성 사이의 불균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역대 정부들은 교육 제도를 교육원리에 따라 운영하기보다는 정치의 도구로 이용하며 교육적으로는 방치하다 보니 교육자체가 점점 더 제도권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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