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윤석열 정부 1년을 맞아 정책을 평가하는 자리인 ‘윤석열 정부 1년 정책 평가 및 제언 토론회 - 표류하는 성평등 정책 방향키 잡기’를 마련했다. 참가자들은 △총론 △젠더폭력 △노동 △가족/돌봄/복지 △평화 △정부를 주제로 발제했다. 토론회에서 나온 발제를 요약해 싣는다.

15일 오전 스토킹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한 서울 중구 신당역 화장실 인근의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지난해 9월 15일 오전 스토킹 여성 살해 사건이 발생한 서울 중구 신당역 화장실 인근의 모습. ⓒ뉴시스·여성신문

윤석열 정부는 ‘국익과 실용’, ‘공정과 상식’을 국정운영의 원칙으로 삼고 지난해 5월 10일 출범했다.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다는 자세로 정책을 추진’하고, ‘국민의 상식에 기반해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치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 ‘국민’에 포함되는 자가 누구이며, 포함되지 않는 자는 누구인지, 그 국민의 ‘상식’은 무엇이며, 그것은 누가 정하는지는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의 젠더 기반 여성폭력 대응 정책의 순항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구조적 성차별’이 젠더 기반 여성폭력을 설명하는 핵심인데, 이를 부정하면서 출발한 정부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윤석열 정부 120대 국정과제’에서 ‘젠더’를 키워드로 한 과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성평등’ 역시 마찬가지이며, 일부 일자리 관련 과제에서만 ‘양성평등’이 간혹 비칠 뿐이었다.

‘국민 안전’ 관련 과제의 일부에서 젠더 기반 여성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성희롱’, ‘성매매’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며, 성폭력,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스토킹 등은 갑자기 ‘젠더’도 ‘여성’도 잃은 채 그저 ‘5대 폭력’이 되어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겠다는 과제로 묶여버렸다. 주요 내용은 ‘양형기준 강화’, ‘종합적 원스톱 서비스’, ‘사회적 약자 보호 강화’와 같은 단어들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과제가 그리는 ‘젠더 기반 폭력’은 단순하다. 인권을 향유하는 인간이 아닌 ‘보호의 대상’으로 한정되는 피해자,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사법시스템에 신뢰를 잃은 사회, 그래서 유무죄의 판단조차 받기 어려운 사회에 대한 성찰은 빠진 그저 ‘양형기준이 강화’라는 단어로 호도된 세계, 왜 부처별 분산이 필요했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피해자 중심’이라는 말로 포장된 ‘효율적’인 ‘원스톱 시스템’의 세계.

젠더 기반 여성폭력이 왜 발생하는지, 그로 인한 특수성이 무엇인지를 삭제해버리면, 이 명확해 보이는 과제들엔 껍데기만 남는다. 특히, ‘피해자 중심’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사건 발생부터 해결까지 피해자가 직면하는 매 순간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그 문제의식을 사회의 변화로 이끌어내는 전 과정에서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지, 단지, 분산되어있는 범죄피해자지원사업을 모아 원스톱으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근본적이고 복잡한 질문은 사라지고, ‘국민’이 아닌 대상화된 피해자를 ‘우리’가 ‘보호해줄게’만 남은 것이다.

이는 이후 여성가족부의 행보를 통해 분명해진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인하대학교 성폭력 사망 사건에 대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닌 성폭력 사건이다”라고 하고, 서울 신당역 스토킹 살해사건에 대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이중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은 지난해 12월 1일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다시 반복되며 쐐기를 박았다. ‘여성폭력’을 일괄 ‘폭력’으로 변경한 것이었다. “좀 더 다양하고 포괄적인 모두를 위한 양성평등정책을 담았다”는 여성가족부의 설명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성인 여성 3명 중 1명이 살면서 한 번 이상의 여성폭력 피해를 경험하고, 강력범죄 중 여성 피해율이 86%에 달하는 현실 속에서 ‘다양하고 포괄적인 양성평등’을 위해 ‘여성폭력’이라는 단어를 ‘폭력’으로 바꾸는 것이 평등인 것인가. 여성폭력 피해의 실제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지우는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젠더 기반 여성폭력에서 ‘여성’지우기는 사실상 정책의 기반을 삭제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여성폭력’은 수십 년간 피해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법적 용어이자 정책용어이다. ‘여성폭력’은 이를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닌, 불평등한 성별 권력관계를 포착하기 위한 용어다. 이에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서도 ‘여성폭력’을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신체적ㆍ정신적 안녕과 안전할 수 있는 권리 등을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여기에서의 ‘성별’은 ‘젠더’를 의미한다.

정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다만, 이를 여성과 남성의 ‘갈등’의 문제로 만들어 그 ‘갈등’에서 이득을 보겠다는 누추한 작전, ‘여성’을 지움으로써 ‘여성폭력’의 현실을 호도하고 관련 정책을 축소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본질을 외면한, 근거 없는 ‘모두를 위해서’라는 ‘주장하기’는 번번이 실패하는 중이다.

고작 1년이 지났을 뿐이다. 젠더 기반 여성폭력 관련 대응이 1년 새에 눈에 띄게 후퇴할 리 없고, 모든 부진이 일련의 지난 1년 때문만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애초에 젠더 기반 여성폭력에 대한 (의도적인) 몰이해로 국정과제 설정부터 미흡했다는 점이고, 그 미흡한 기반 위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 특히, ‘여성폭력’을 ‘폭력’으로 교체하는 등과 같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4년이 남았다. 무엇을 새로 시작한다 해도 결코 늦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지금이라도 젠더 기반 여성폭력 관련 정책을 완전히 재검토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다는 ‘주장’을 폐기하고, 여성폭력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 발생하는가, 왜 반복되는가, 왜 유독 피해자가 비난받는가, 왜 관련 데이터는 제대로 축적되지 않는가. ‘기반이 위험했다’는 평가는 정책 전반에서 질문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정녕 ‘국민 모두’를 위하고자 한다면, 그 ‘모두’에 여성과 젠더 기반 여성폭력 피해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복잡하게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국민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본인 제공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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