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큰동서가 세상을 뜬 지 벌써 3년째다. 무쇠처럼 튼튼하게만 보였던 큰동서는 별 것 아니라는 담석수술을 받은 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더니 결국 병명도 뚜렷이 알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최첨단 의술을 자랑하는 시대에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니 남은 사람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큰동서가 살아 있으면 지금쯤 얼마나 재미있을까, 살아가면서 나는 문득문득 그런 상상에 빠질 때가 많다. 더욱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큰동서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져간다. 상황이 조금만 달랐다면 훨씬 더 사이좋게 지냈을 텐데 뭔가 미진한 상태로 헤어진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특히 설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이 다가올 즈음이면 나는 공연히 서성거린다. 큰동서로부터 전화가 올 것만 같아서다. 결혼해서 꼭 30년 동안을 명절 때마다 나는 큰동서의 조수노릇을 했다. 큰동서가 시키는 대로 나물을 볶고 전을 부치고 탕국을 끓이고 산적을 만들었다. 완벽한 요리사였던 큰동서의 지시만 잘 따르면 음식 맛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갓 결혼했을 때는 명절과 제사 때마다 미리 와서 일하라는 호출이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집안에서 자라난 나는 어떤 형태의 의례에 대해서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결혼 초에는 3년 동안 직장에 다녔고 그만둔 후에도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셋씩이나 키우느라고 늘 허덕허덕했다.

이런 정상을 조금도 참작하지 않고 무조건 며칠씩이나 파출 봉사를 요구하는 큰동서가 내게는 무서운 사감선생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 역시 아직 유교적인 교육을 받은 세대라 속은 부글부글했지만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기만 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큰집으로 향하면서 나는 연로한 시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젊은 며느리가 왜 그렇게 차례나 제사에 목을 맬까 처음엔 정말 이해가 안 갔다. 큰동서는 나보다 고작 여덟 살밖에 더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큰동서는 나하곤 한 세대 차이 나는 어른처럼 행동했다.

이런 며느리를 싫어할 시어머니가 어디 있을까. 나의 시어머니는 큰동서를 아주 흡족해 했다. 손도 크고 마음도 넓고 솜씨도 뛰어나다고.

그런데 이쯤서 그만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다음엔 꼭 나를 비겼다. 너는 큰형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간다고. 내가 아무리 무딘 여자라고는 해도 면전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교당하다 보면 마음이 조금은 꼬일 수밖에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만 만나던 큰동서와 가까워지게 된 건 내가 살던 동네로 큰동서가 이사를 오면서부터였다. 집안일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함께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게 되면서 나는 큰동서를 나보다 조금 더 나이 먹은 여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현모양처로만 보였던 큰동서에게서 자아가 강한 문학소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얼마나 신선했는지 모른다. 큰동서는 타고난 큰며느리가 아니었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착한 여자였을 뿐이었다. 결혼 이후 계속 어려워지던 집안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가 택한 방법이 전통적인 의례를 정성껏 지키는 일이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비록 늦긴 했지만 큰집은 다시 일어섰다.

나는 큰동서를 좋아했다. 하지만 동서라는 관계는 아주 미묘한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문제에서 나는 큰동서에게 늘 빚을 진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선뜻 그 빚을 갚기에는 난 이기적인 여자였다. 나는 큰동서의 괴로움을 빤히 알면서도 그냥 모른 척하고 지냈다.

큰동서가 떠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대를 물린 차례와 제사는 최대한 간소화되었다. 때로는 주문한 제수가 제사상에 올려진다. 갑자기 떠난 만큼 빈 자리는 더 컸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큰동서의 전화를 고대하던 나는 마음을 다잡고 집에서 혼자 음식을 만든다. 큰동서가 시켰던 대로 나물을 볶고 전을 부치고 탕국까지 한 들통 끓여 놓는다. 일하는 내내 큰동서와의 수다를 떠올리면서. 큰동서의 부산사투리는 얼마나 사근사근했던지. 아, 산다는 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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