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 독립운동가 '여성'도 재평가돼야”
“좌익 독립운동가 '여성'도 재평가돼야”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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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북아 역사 인식의 문제가 한·중·일 세 나라에서 격론에 휩싸여 있다. 가까이는 일제시기 문제에서 멀리는 고구려사에 이르기까지 그 폭과 깊이에서 만만치 않은 논쟁거리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에 못지 않게 국내에서의 과거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논의가 쉽사리 그 가닥을 잡지 못하는 것은 분명 한국 사회의 복잡한 현실을 반영하는 터이다. 식민지 해방이 남북 분단으로, 더욱이 한국전쟁이라는 크나큰 상처가 지금도 가시지 않은 탓에 우리는 아직도 그 진통에서 깨끗이 해방되지 못했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치러온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꾸준히 민족항일운동을 해온 이들에 대한 올곧은 인식과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그 동안 여성사학계에서 알려진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와 그들에 대한 평가를 알아보고 그 문제점을 생각해 본다.







해외 활동 사회주의계 여성사 연구 전무



허정숙, 유영준, 강주룡, 김알렉산드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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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창립총회


좌파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1927년 근우회에 참여한 유영준, 정칠성, 정종명, 허정숙 등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이다. 이들은 근우회라는 좌·우익 통합 단체가 생기기 전인 1920년대 초부터 이 땅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단초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당시 그들의 활동은 항일민족독립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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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룡이 을밀대 위에서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알리는 투쟁을 하고 있다. 원내는 강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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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렉산드라(왼쪽)


유영준이 평양의 기예학교를 다니다 일본에 유학, 의사가 되어 귀국한 후 여성운동에 투신하여 '근우회'라는 단체 이름을 짓는가 하면 정종명도 일찍이 '여자고학생상조회'로 가난한 여성에게 배움의 길을 개척해주는 데 진력하였다. 이후 그는 산파라는 직업을 가지고 근우회 대표를 수행했다.



정칠성도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을 극복, 근우회 대표로 농민, 노동자 여성을 대변하고 여성 민중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다. 허정숙은 좌익계 부친 허헌의 영향도 받았겠지만 중국, 일본 그리고 세계의 첨단 사상 수용에 민감하게 반응, 당시 민족과 여성의 앞길을 여는 선구적 역할에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는 1936년 만주로 망명, 그곳에서 무장독립운동에도 가담했고 광복 후 북한의 김일성 체제에서 90년대 초까지 고위 관직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허정숙의 행적에 대해서는 연변의 대작가 고 김학철 선생의 비판도 없지 않다. 그밖에 조선공산당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독립운동에 기여한 여성들도 적지 않다. 김명시, 박진홍, 이순금, 강경자 등이 그들이다.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의 지도 아래 거행된 윤봉길, 이봉창 등의 의거에 동참한 여성은 이화림이다. 윤봉길, 이봉창은 독립운동가로 더없이 기림을 받고 있으나 그들을 도운 이화림은 그 이름조차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 역사의 현실이다. 그는 만주에서 김원봉의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에 가입,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중국공산당과 연계하여 항일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한 여성은 아직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에서 사라져 가거나 은폐되어 있는 형편이다. 지금까지 분단의 상황이 낳은 좌우 사상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 불목의 소산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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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우회 임원들(동아일보 1928년 1월 6일자)


평양의 을밀대 위에서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알리고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했던 강주룡. 그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평가는 거의 허용된 적이 없다. 단지 몇몇 여성사연구자들의 개인적인 연구 속에 제한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본다면 김알렉산드라가 있다. 그에 대해서는 96년 정철훈의 '김알렉산드라평전'(필담사)이 나와 그의 생애와 활동이 사료와 함께 자세히 소개된 바 있어 다행하고 감사할 일이다.



김알렉산드라는 1885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조선이주민 사회의 고난 속에 자립심을 키우며 성장했다. 그는 11세에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사한 뒤부터 철도건설 현장에서 생활하며 노동자와 소수민족 사회에 대한 이해를 체득했다. 또 1902년 부친이 별세한 후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역사를 공부하던 중 러시아 혁명사상가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졸업 후 양부의 아들인 스탄케비치와 혼인한 그는 두 아들을 낳아 가정을 꾸리기도 했지만 1905년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1917년 2월 혁명에 참가, 1918년 차르에 의해 처형당하기까지 한인사회당의 결성과 러시아 혁명 투쟁에 적극 헌신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는 여성사에서뿐 아니라 한국의 공산주의 역사에서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부끄럽게도 잘 알지 못한다.



이 같은 현상은 대부분의 한국여성사 연구가 기본적으로 협소하게 이뤄지고 있는 데다 아직도 이념상의 문제를 뛰어 넘는 폭넓은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해외 여성사 연구는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 한 개인적인 작업으로는 하기 어려움은 자명한 사실이 아닌가. 결국 해외에서 주로 활동한 사회주의계 여성사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으로 한 마디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일제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이념이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전향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황신덕만 해도 1920년대 초에는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차츰 개량주의화하고 급기야는 친일행위에 나섰다는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같은 예가 비단 황신덕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친일 여성이 민족주의계에서만 나온 것처럼 강조되는 것도 역사의 또 다른 왜곡이다.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허하백 같은 여성도 당시 친일 여성으로 지목받은 바가 없지 않다. 결국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일이 아닌 동시에 단선적인 이해만으로 역사를 가늠하는 인식 태도는 여전히 그리고 엄중히 경계돼야 할 일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 방법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실천적 사고가 요구되며, 이에 대한 역사연구자의 노력은 한층 배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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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숙



서울여대 여성연구소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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