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가끔 여유로운 기사들을 만나 유쾌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일단 말을 걸어오는 게 무섭기만 하다…

버스 중앙차로제가 시작됐을 때 참으로 시끌벅적 하더니 두 달이 지난 지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잠잠하다. 참을성이 없는 건지 참여정신이 왕성한 건지 모두들 끓기도 잘하고 식기도 잘한다. 나처럼 '좀 기다려 봐∼'하는 사람은 무조건 회색분자로 몰린다. 난 그저 영원한 경계인일 뿐인데. 참, 요즘은 가끔가다 '회장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왜 있잖아, 언젠가 여기서 내가 전국경계인연합회나 만들어 볼까라고 헛소리를 늘어놨었거든. 눈 밝고 기억력 좋은 사람들이 몇 있어서 나한테 전경련 회장이라는 감투를 씌워주더라고. 육십에 능참봉이라더니 늙그막에 웬 가문의 영광? 그런데, 그, 회장님이라는 호칭, 그거 썩 괜찮게 들리는 걸 보면 사람들이 왜 죽자하고 출세하려는지 알 것도 같아.

아무튼 요즘은 버스 타는 게 한결 좋아졌다. 몇 십년 만의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버스 안은 냉방완비에다 뻥 뚫린 가운뎃길로 쾌속질주다. 게다가 뭐니뭐니 해도 버스기사의 신경질적이며 곡예사적인 운전행태에서 해방될 수 있어서 기쁘다. 엊그제는 뒷문으로 내리는 승객들에게 큰 소리로 안녕히 가시라고 일일이 인사를 하는 기사까지 다 봤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의 버스 탑승 50년사를 돌이켜 보건대 착실히 운임을 내고도 나는 승객이 아니라 늘 화물로 취급되었던 것 같은데 드디어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 날이 도래한 것이다. 이런 경사가! 이번에 버스운행의 공영성이 강조되면서 기사의 근로환경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열렬한 버스예찬자(동시에 지하철 숭배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다 보면 택시를 탈 경우도 더러 생긴다. 늘쩡거리다 약속시간에 촉박해졌다거나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엄두가 안 날 때이다. 때로는 택시기사들이 너무 살기 어렵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일부러 택시를 탈 때도 있다. '있는 사람들'이 소비를 해 줘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 때문인데 주제넘은 생각인가. 하지만 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커밍아웃하는데 누가 말려.

사실 내가 택시 타기를 좋아하지 않은 데는 버스나 지하철보다 훨씬 비싸다는 이유가 물론 가장 결정적인 요소였지만 그 다음으로는 비싼 돈을 내고도 억울한 기분이 들 때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택시 잡기가 워낙 어려웠던 시절에는 손님이 기사눈치를 보느라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가까운 거리를 가자고 하면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고 난폭운전을 한다거나 마음대로 합승손님을 받는다거나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는 등.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그저 참는 도리 밖에 없었다. 기사는 왕이었다. 내 돈 내고 시종노릇 하는 게 기분이 나빠 가능한 한 택시를 안 타고 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디서나 빈 택시가 줄지어 서 있는 풍경이 익숙해졌다. 그러니 이제는 손님이 왕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내는 고객으로 대접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봄직 하지 않은가. 하지만 기대는 말짱 꽝이다. 피곤을 줄이기 위해서 잡아 탄 택시는 오히려 피곤을 한층 배가시킨다. 타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도 시큰둥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수입이 한껏 줄어들어 사는 게 팍팍하기만 한 기사는 자신의 짜증을 오랜만에 만난 손님인 나한테 몽땅 풀어 놓고 싶은 모양이다.

마치 결석생이 많으면 애꿎은 출석생이 선생님의 꾸중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요즘 택시는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손님을 전전긍긍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가끔 여유로운 기사를 만나 유쾌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일단 말을 걸어오는 게 무섭기만 하다. 예전에는 그래도 손님의 기분을 살펴가며 말문을 튼 것 같은데 이젠 막무가내다. 타자마자 그냥 속사포로 쏟아낸다. 개인택시건 회사택시건, 젊은이건 나이 든 이건 모두들 울분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있다. 아, 이 고달픈 세상.

편하자고 택시를 탔는데 거꾸로 내가 위로를 해줘야 하니 이런 황당할 때가 또 있나. 도대체 택시 타고 쿨하게 손님 대접 받으려면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 혹시 택시도 공영제 밖에 대안이 없는 걸까.

어디 택시만이랴. 엊그제 음식점에서였다. 손님은 붐비고 종업원 수는 턱도 없이 모자랐다. 요즘은 불황이라 다들 종업원 수를 줄인단다. 그러니 접시나 컵이나 뭐하나 갖다 달라고 하기가 그렇게 눈치 보일 수가 없었다. 짜증이 차오른 종업원의 표정에 잔뜩 주눅이 든 누군가가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무서워∼”

그런데 의문 한 가지. 혹시 여성들만, 혹은 나만 이렇게 무서워하나?

박혜란/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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