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시선으로 성녀/창녀, 마녀/수녀/마조히스트 등으로 분류돼

섹슈얼리즘 상상력, 성별 금기 조롱, 아버지 이름 둘러싼 허위 폭로 등 양상 다양화

내가 아는 모든 여성 시인들의 이름을 나열해 본다. 금방 떠오른 이름만 서른 남짓이다. 이 가운데는 여러 권의 시집을 통해 만난 시인도 있고, 한 두 편의 시로 만난 시인도 있다. 이 가운데는 또 '여자'라는 것이 유표적이라는 것을 알기 이전에 만난 시인도 있고, 그것이 지독한 꼬리표임을 깨닫고 나서 만난 시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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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여성 시인은 남성적 사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분법에 의해 성녀 아니면 창녀로 분류될 수도 있고, 이런 분류에 대항하여 제안된 착한 여자, 미친 여자, 나쁜 여자의 삼분법에 따라 분류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보다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적용하여 마녀, 수녀, 기생, 주모, 주술사, 마조히스트 등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여성 시인들을 일별하는 이 짧은 글을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풀어가려고 한다.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된 여성 시인은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고 노래한 김남조이다. 교과서 말고는 시를 접하지 못했던 그 때, 김남조는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사슴'의 작자 노천명과 더불어 교과서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여성 시인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내가 아는 단 두 명의 여성 시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내게 여자도 시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존재였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에서 별 감흥을 받지 못했던 것 같은데, 사내아이가 되고 싶었던 사춘기의 계집애에게 '눈물'이며 '슬픔'은 나약함과 내숭으로 대표되는 여자다움의 징표에 불과했기 때문이리라.

여성 시인의 시에서 모성 느껴

그 눈물과 슬픔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깊은 연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고 나서야 나는 그들의 시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나의 분열적인 시선 때문임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마음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 김남조를 비롯하여 천양희, 강은교 그리고 나희덕을 읽는다. “산 채로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한 번 더 벗겨내어” 결국에는 당신의 “입술에서 다시 한번/ 밤꽃 시절에 흐르던 눈물”로 다시 나겠다고 생밤을 까며 노래하는 박라연이나 스스로 빵이 되고 빈대떡이 되어 굶어죽을 뻔한 마을을 살려내는 노혜경을 읽는다. 그 어법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깨어진 무르팍을 더럽다 않고 빨아주는 어머니의 마음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참 후 나는 대학 도서관의 서가에서 빛바랜 채 꽂혀 있는 김승희를 만나게 되었는데 지금은 나의 은사이기도 한 그의 첫 시집 '태양미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의 시는 강렬하고, 새롭고, 힘있고, 또 아름다워서 그 시집의 지독한 관념성마저도 매력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거기에는 이성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성적인 구별을 초월한 원시와 신화의 세계가 찬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세계가 우리 고유의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나는 우리나라에 이처럼 강렬한 역동성을 보여준 시인이 남녀를 불문하고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이 아직 아버지의 잔인함과 남근의 폭력성과 제도의 냉혹함을 경험하지 않은 순결한 영혼에게만 허여된 축복임을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최승자나 이연주를 만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처음 만난 최승자는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일 뿐 일찍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자학하고 있었으며, 김혜순도 그때는 피와 무덤과 어둠과 질척거림을 노래했고, 이연주는 노골적으로 짓물러짐과 문드러짐과 으깨어짐과 부러짐을 노래했다. 황인숙만이 예외적으로 수염 쓰다듬는 고양이와 반지하 방에서 내다보이는 경사진 골목을 노래하며 우울 위를 경쾌하게 뛰어 다녔다. 김정란, 허수경, 이진명 등은 모두 각기 다른 언어로, 그러나 다르지 않은 톤으로 아픔과 고통을 하소연했다.

소통, 진정성, 저항언어에 관심을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고통과 아픔이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그 절규와 신음에 매혹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절망이 역겨웠고 그들의 아픔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들 덕에 내게 여성으로서의 자각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 시사에도 여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자각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제 여성 시인의 시는 한국 현대시의 하위 유형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만큼 그 양상도 다양해져서 굳이 여성시라는 범주로 묶는 것이 무색할 정도이다. 물론 김언희나 박서원은 섹슈얼리즘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별의 금기를 보란 듯이 조롱하는 부류로, 조말선이나 성미정은 알레고리와 상징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을 둘러싼 견고한 허위를 폭로하는 부류로, 이수명이나 김행숙은 언어 그 자체를 조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풀어놓음으로써 억압에 저항하는 부류라고 굳이 유형화할 수도 있다.

다른 여성 시인들이 쓴 작품을 읽으면서 요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들 여성 시인의 소통 문제와 진정성의 문제이다. 특히 저항의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의 언어가 여전히 전위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내게 중요하다.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이, 그리고 여성으로서 시를 쓰고 학문을 하는 일이 유표적인 일임을 알게 된 내게 이 문제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찾아가는 실존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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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영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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