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는 타란텔라 춤이라는 것이 있다. 경쾌한 춤이다. 그러나 이 춤이 생겨난 것은 '타란 추러'라는 독충에게 물린 사람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껑충껑충 뛴 데서 비롯된 것이라 전한다. 그 아픔이 도리어 유쾌한 춤으로 발전된 것. 바로 그 타란텔라 춤 같은 것이 시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다. -이어령의 '시 그리고 삶에의 출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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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사시사철 시(詩)가 안 어울릴 계절이 있으랴마는, 조만간 들이닥칠 단풍과 함께 마음도 왠지 농익은 감성으로 물들 듯한 가을엔 꼭 시와 친해져야 할 것만 같다.
붐비는 지하철 한 귀퉁이에서, 거리를 걷다가도, 때론 일에 몰두하다가도 왠지 흥얼흥얼 노래 부르듯 시를 읊고 싶어진다. 문득 위로받고 싶은 막연한 심정에서. 이런 순간만은 왠지 삶의 한가운데, 그 분망함 속에서 갑자기 뚝 떨어져 나와 자신만의 '섬'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시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의 핏멍이 보이지 않는
행복한 번역체로,
그리운 그리운 제국주의의 번역체로,
다시 쓸까, 내 고백을, 내 자서전을,
나의 성공한 실패들의 집적을,
내 무의미의 집대성의 神殿(신전)을.
최승자 시인의 '삼십대의 저서전' 중 한 구절이다.
이를 받아 시인 김정란은 여성의 언어로 시를 쓰고, 읽는다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존 사회인) 아버지의 집에서 나는 내 말을 할 수 없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말을 서툴게 번역이나 할 뿐”이라고. 그래서 그는 결론 내린다. 상처를 숨기고, 행복한 체하며, 여자들의 모국어는, 아직, 없다, 고('이제 더 이상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은 외출' 중).
이 가을, 스스로의 정체성과 감성으로 '치유'의 언어를 발견해내고, 또 농익혀 가는 시도를 해봄직 하지 않을까.
박이은경 편집국장pl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