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시

이브 본느프와의 '신들'

릴케가 물었다. '사랑은 나를 어떻게 찾아왔는가'라고. 그 질문은 '시는 어떻게 나를 찾아왔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렇다. 내가 시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찾아왔다. 어느 날, 어느 석양, 내 영혼이 가장 간절한 기원으로 떨고 있을 때,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내 영혼이 무의 바닥을 치며 까무룩히 가라앉으며 동시에 위로 치고 올라섰을 때, 그때, 내 존재에 슉슉 구멍을 내면서.

시는 그 본질에 있어 사랑과 같다. 시는 내가 아닌 것을 영접함으로써 완성에 이르려는 끊임없는 도정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어떤 시들은 영혼을 뒤흔든다. 이브 본느프와의 '신들'이라는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오랫동안 그 울림으로 마음을 떨었다. 그 시는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일종의 변종 장르 같은 것으로 쓰였는데, 그 시에서 본느프와는 제목을 빼고 어디에서도 '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발표된 시점을 생각해 보면, 이 시가 라캉을 중심으로 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의 언어관에 보내는 일종의 문학적 응전양식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위대한 시는 '문학적'인 전략을 의식하고 있을 때조차, 운명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아주 근원적인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시는 기도이다. 그것은 언어의 길을 따라 신성함에 이르려는 간절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는 종교적일 수는 있지만, 종교는 아니다. 왜냐하면, 시는 종교의 딱딱하게 굳어버린 도그마가 아니라, 펄펄 살아있는 영혼의 증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도그마를 말하는 시를 신뢰하지 않는다. 신과 부처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그런 시들을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인 시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런 시들은 이미 종교를 위한 선전물이다.

본느프와는 우리가 얼마나 딱딱한 재료로 신성함을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그가 “우리는 어느 가을날 오후가 끝나갈 무렵, 석수들과 함께 제일 높은 테라스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때 마치 바람이 불러낸 것처럼 '그것'이 갑자기 솟아올라왔다”라고 쓸 때.

내 무딘 연장은 돌을 잘 쪼아내지 못한다. 나는 다만 간절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그 나머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머물렀다 떠난다. 내 평생의 기다림은 별의 먼지가 되어 우주공간을 떠돌 것이다.

김정란

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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