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셔먼의 작품세계에 대한 단상

사람의 것으로 느껴지는 '몸의 내장'들이 쏟아져 놓여 있다. 그것들은 시간이 오래 지났는지 부패되어 곰팡이가 극성스럽게 퍼져 나간다. 이 극명한 사진이미지는 신디 셔먼의 87년 작업이다. 이 이미지가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킬까. 나의 관심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디 셔먼은 자신의 몸이 재현의 대상이다. 그의 초기작업은 영화나 TV에서 문화적으로 스테레오 타입화된 여성들의 이미지를 패러디하며 자신이 그 영화 속의 여인으로 분장해 이미지를 재현했다. 그 재현은 다시 보게 하기와 낯설게 하기로, 동시대 문화의 '현상들'을 꼬집는다. 그의 이미지들은 여성들의 실재를 들어내 보이므로 다시 생각하기를 촉구한 것이다. 그런데 '여성 이미지'는 여성의 주체는 보이지 않고, 남성들의 시선만을 의식할 수 있을 뿐,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여성은 거기에 없었다. 뒤이어 이어지는 작업들은 '심리적 위축현상'을 드러낸, 하루 종일 남편의 전화만 기다리는 여성, 자신의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는 듯 한 귀퉁이에 소외된 여성 등 공포, 불안, 초조, 극도의 긴장된 여성이미지를 그는 창출시켜냈다.

85년부터 셔먼의 작업은 전격적으로 바뀌었다. 재앙(Disasters)이미지들이 그것이다.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듯한 여인으로, 해체된 신체로, 쥐가 득실거리는 곳에 웅크리고 있는 여인으로, 생각의 저 깊은 곳에서 절대로 그것들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선언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거기에 거처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느끼게 한다. 마음 저 밑바닥으로부터 거부할 수밖에 없는 그것들을 '대상화' 한 셔먼의 작업엔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려는 전략이 있다.

나는 최근 어렵사리 '비천함(Abjection)'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여성적 그로테스크에 대해 논하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따르면 비천함을 여성적 그로테스크의 표상으로 제시, 오이디푸스 전 단계, 즉 여성적, 모성적 공간을 은유하며 출산을 학살과 생명의 정점(외부와 내부, 자아와 타자, 생과 사)으로 본 어머니와의 외상적(Traumatic) 분리를 통해 상징계로 진입하기 바로 그 이전의 감각적, 잠재적 '지대'로, “주체로도 객체로도 불릴 수 없는, 그 무엇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지대”를 의미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기가 엄마의 양수 속에서 행복했던 시간을 잃고, 엄마와 분리되는 상황의 시·공간의 경험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아기는 엄마의 양수를 '더럽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의 이러한 이론들은 나로 하여금 신디 셔먼의 작업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몸의 외피만을 재현해 왔던 미술의 역사를 전복시키려는 그는 정상이라는 것, 비정상이라는 것 등의 고정개념을 뒤흔들며, 아름다움의 이데올로기를 정면에서 공격하며, 더러움, 추함, 장애, 기형, 파손, 흉함 등 우리들이 소외하고 천시하는 모든 것들을 다 끌어안고 있다. 그의 작업은 우리들의 또 다른 상상을 촉구한다. 생태계의 미래와 인간존재의 위기까지도 체험케 하는 그의 작업들을 내가 이해하듯이, 그 기호적 체계의 의미망인 여성의 경험, 여성의 시선, 여성의 재현들을 진정 남성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를 나는 하게 된다.

나도 같이 이 질문을 한다. “누가 이것을 더럽다고 했느냐?”

박영숙 여성문화예술기획 공동대표, 페미니스트 포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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