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경 /

<뉴스위크>한국판 편집장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자서전 '마이 라이프' 1편은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클린턴은 유복자로 태어나 간호보조사를 하는 어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 클린턴이라는 성은 폭력적인 계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클린턴은 어머니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취업차 뉴올리언스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아칸소와 텍사스 주 경계에 있는 호프라는 작은 도시에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손에서 컸다. 이런 환경에서도 재능 있던 그는 어머니의 극성스러운 뒷받침을 받아 미국의 대통령으로 성장했다. '마이 라이프'에 드러난 그의 유년시절은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미사여구가 보태진 것이 아니라면).

정부가 최근 발표한 한국의 경제상황 진단 결과를 읽으면서 '클린턴 신화'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체된 가정과 가난, 그 굴레를 돌파하는 한 어린이의 성장기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의 모습을 보면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능력밖에 없다는 자조 섞인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예로부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다. 안정된 가정은 국가와 인종의 다양성을 고려할 필요도 없이 한 사회의 존립기반이다. 그런데 계속되는 경기침체가 가정을 깨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통계가 줄줄이 발표되고 있다.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가난으로 인해 이혼, 자녀방임, 가출 등의 가정해체 현상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정부의 자체 진단결과가 나왔다.

국무총리 국무조정실이 교육부, 복지부 등 관계부처와 합동으로 조사해 열린우리당과의 당정회의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기본생계도 못 꾸리는 서민가정이 해체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이혼건수는 93년보다 세 배 가량 급증한 16만7000건이며, 정부가 표본으로 조사한 부산시의 경우, 시설보호 아동 수만 올 5월 2550명에 이른다고 한다. 전기나 수도가 끊긴 골방에서 지내는 가정도 9만여 가구나 됐다. 또 자녀들의 학교공과금을 못내는 가정도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 보고서에는 또 “가계수지 악화 등으로 단전·단수가구, 국민연금 미납자와 건강보험료 체납가구수가 증가하는 등 최소생활 영위가 곤란한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가족 해체 및 위기가정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실업, 소득감소, 카드빚, 개인파산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이 결국 이혼, 가출, 가정폭력 등으로 이어지면서 가정을 급속하게 해체시키는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현상이 가진 것 없는 서민들뿐 아니라 중산층, 심지어는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해체 도미노의 끝이 어딜지 모를 일이다.

절망스러운 것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데 있다. 소비는 위축되고 중소기업들은 연이어 도산하는 상황에서 일자리가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자리가 있어야 정상적인 개인과 가정생활을 되찾는 기반이 될 터인데 말이다.

정부와 여당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념논쟁과 입으로 하는 개혁작업에 빠져서 너무나 안타까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정이 최소한의 생계문제로 인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가진 자들이 불안심리로 인해 돈을 풀지 않아서 생기는 경기침체는 분명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가정이 소중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너진 가정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사회의 미래도 어두워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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