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이유경 ㈜엔투비 사장
1990년 여성공채 1기로 입사
포스코그룹 첫 여성 CEO 올라 

 

이유경 엔투비 사장 ⓒ홍수형 기자
이유경 엔투비 사장 ⓒ홍수형 기자

‘유리천장을 깬 철의 여성’. 포스코 첫 여성 CEO에 오른 이유경 ㈜엔투비 사장을 두고 언론에서 붙인 수식어다. 1990년 육중한 설비와 뜨거운 쇳물을 다루는 ‘포항제철’에 입사해 30여년을 근속하고 최고경영자가 된 여성 리더를 향한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포스코타워에서 직접 마주한 이 사장은 ‘철의 여성’이라는 차가운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긍정적이며 상대를 먼저 살피는 따뜻한 어투에서는 세심함이 느껴졌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숱한 애환과 분투의 날들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이 사장은 일하는 여성들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어느 자리에서든 주도성을 갖고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며 성공의 경험을 쌓다 보면 날 인정해주는 동료, 상사를 만난다. 운도 좋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0년 여성 공채 1기로 입사
여성동기 50명 중 12명 30년 근속

“포항제철이 女性人材(여성인재)를 찾습니다. 스스로 진취적이고 의욕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직장을 결혼 전 잠시 거쳐 가는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포항제철과 함께 내일이 있는 오늘을 가꾸어 나가지 않겠습니까?”

1990년 일간지 1면에 실린 포스코(당시 포항제철)의 여성 공채 문구다.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계 IT기업 기업에서 근무하던 이 사장은 이 광고를 보고 가슴이 떨렸다. 대기업 여성 공채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박태준 당시 포스코 회장이 여성 인재를 양성하는 선두 기업이 되겠다며, 50명 전원을 여성으로 뽑았다. 회사로서도 모험이었다.

“공채 모집 광고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아직도 여성이 결혼하면 집에서 아이만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이젠 그렇지 않다. 포스코에 들어오면 모든 업무에서 남자 직원과 똑같은 대우를 해 줄 테니 같이 일해 보자’는 내용이었어요. 실제로 마케팅, 기획, 홍보, 제철소까지 전 부서에 여성이 두루 배치됐어요.”

공공연하게 직무차별을 하던 시기, 남성과 동일한 직무에 배정한다는 채용 조건은 파격이었다. 이 사장은 ‘이거다’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49명의 동료들과 함께 1990년 여성 공채 1기로 포스코에 입사했다. 고려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이 사장은 수출부에서 포스코인(人)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함께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성 동기 중 12명이 재작년까지 30년 근속했다. 현재는 10명이 포스코에 몸담고 있다.

“여성 동료 50명이 함께 입사했기에 경직돼 있는 사내 문화도 바뀔 수 있었고,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주면서 여성 커리어에서 ‘데스밸리’라 불리는 결혼과 출산, 육아 같은 고비도 잘 넘길 수 있었어요.” 

이유경 엔투비 사장 ⓒ홍수형 기자
이유경 엔투비 사장 ⓒ홍수형 기자

“포기 말라”며 손 잡아준 상사와
네 자녀 길러 준 시어머니가 은인

이 사장이 입사 직후 맡은 업무는 동남아시아 냉연수출이었다. 해외출장이 흔치 않던 시절, 입사한 지 1년도 채 안된 여성 신입사원인 그에게 싱가포르 출장 기회가 주어졌다. 바이어 계약 체결을 위한 출장이었다.

“신입사원이라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진 않았지만, 회사가 주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회사의 기대를 받는 만큼 잘 해내고 싶다는 동기 부여가 됐어요.”

‘여성 공채 1호’라는 상징성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았다. 역차별이라는 일부 반발도 있었고 ‘여성 공채 직원들이 1년 안에 퇴사하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부담도 컸지만 혜택도 많았다. 모든 업무에 지원할 수 있었고 수평적 이동이 가능해 다양한 분야를 경험할 수 있었다. 수출부서에서 설비구매실로 자리를 옮겨 내외자 설비구매 계약과 사후관리를 맡았다. 이후 원료 구매 그룹장도 맡았다. 2014년 포스코엠텍에서 마케팅실을 이끌기도 했다. ‘여자라서 하기 어렵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직원들과의 협업을 통해 어려운 업무를 처리해나갔다. 이 사장은 다양한 업무 경험을 자신의 성장 원동력으로 꼽았다. 

“순환근무를 통한 경력관리는 직원에 대한 회사의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3~4년 주기로 새로운 업무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비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투자하고 유연한 회사 방침 덕분에 저도 성장할 수 있었지요.”

이 사장이 버틸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동력은 위기 때마다 손을 내밀어준 상사들이었다. 이 사장은 네 자녀를 낳은 ‘다둥이맘’이다. 상사와 동료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막내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회사를 그만둬야한다는 생각을 품게 됐어요.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상태였어요. 회사에서 친정 엄마와 통화를 하며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는데, 지나가던 실장님이 우연히 듣고는 팀장에게 면담을 권했다고 하더군요. 팀장에게 ‘못다니겠다’는 말을 했더니, ‘휴직을 쓰고 고민해보라’고 권유하셨어요. ‘지금은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고 견디면 이 시간도 지나갈 거다’라는 응원이 큰 힘이 됐지요. 8개월간 육아휴직을 하며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용기가 생겼어요.”

상사들은 왜 그만두겠다는 이 사장을 붙잡았을까. 그의 일하는 자세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사장은 “사원일 때는 선배들이 일하는 걸 유심히 보고 배우고, 팀장이었을 때는 그룹장이 하는 일까지 눈여겨본다”고 했다.

“내 일을 상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한 단계 더 나아가 준비하고 일을 바라볼 때 실력이 늘고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가족의 전폭적 지원은 이 사장의 가장 큰 힘이다. 아이 넷을 낳아 키우면서 친정과 시댁에 의존했다. 무엇보다 올해 94세인 시어머니는 함께 살며 네 아이를 손수 돌봐주신 은인이다.

ⓒ여성신문
ⓒ여성신문

고객사 동반성장 위한 ‘좋은친구’ 도입
경영닥터·멘토링 등 재능기부 하고파

이 사장이 이끄는 엔투비는 포스코 그룹사로 소모성 자재를 통칭하는 MRO(Maintenance Repair Operation)에 대한 기업 간 전자상거래를 제공하는 구매-공급 전문 기업이다. 포스코 기업시민 경영이념의 실천을 위해 산업계 상생협력 모델인 ‘좋은친구’ 프로그램, 공급망 ESG 경영 지원사업, 지역사회 환경문제 개선을 위한 폐어망 자원순환 프로젝트, 자립준비청년의 성장 및 자립 지원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프로그램인 ‘좋은친구’는 이 사장이 직접 아이디어를 낸 이름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엔투비는 고객사와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를 지역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활용한다. △산업공단 내 탄소저감 △중소기업 안전, 환경 개선 △취약계층 지원 등 기업시민 기반의 ESG 활동을 고객사와 공동으로 추진한다.

“고객사와 함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취지로 마련한 프로그램입니다. 엔투비는 MRO 자재를 공급받는 철강사뿐만 아니라 MRO 자재를 공급하는 협력사도 고객사로 규정해서 경쟁 위주의 비즈니스 세계에 상생 개념을 포함한 새로운 롤 모델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한 이 사장은 은퇴 이후 ‘봉사’에 초점을 맞춘 삶을 살겠다고 했다. 그간의 경험을 살려 경영닥터나 멘토링을 하며 후배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힘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선배처럼 후배들에게 가슴 따뜻한 선배가 되고 싶다는 꿈이다. 그는 후배 여성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견뎌보라”고 조언했다.

“눈앞에 닥친 어려움이 해결하기 어려운 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거나, 한 템포 쉬고 다시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것도 많아요. ‘구하라, 얻을 것이다’라는 능동적인 자세도 필요해요. 선배들에게 먼저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 문을 두드려보세요. 곧바로 거절하는 선배는 없을 겁니다. 일단 도전해보세요.”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