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마지막 1년 그린
인기 뮤지컬 9번째 시즌 종영
완성도 높은 음악·무대 비해
낡은 서사·부실한 캐릭터 아쉬워
남성 독립운동가 중심 서사 속
여성은 조력자·희생자 그쳐
17일 블루스퀘어 공연 개막

뮤지컬 ‘영웅’ 중 넘버 ‘단지동맹’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 중 넘버 ‘단지동맹’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관객 평점 9.8점, 객석 점유율 90%. 지난 2월28일 LG아트센터서울에서 9번째 시즌 막을 내린 창작 뮤지컬 ‘영웅’은 역대 최다 기록을 썼다. 코로나19를 딛고 쏟아진 대작들 사이에서도 저력을 발휘했다. ‘해운대’, ‘국제시장’ 등 ‘천만 영화 감독’ 윤제균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더 주목받았다. 

13년째 흥행 비결이 뭘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인물”, 도마 안중근 의사가 장엄한 음악과 박진감 넘치는 연출을 만났다. ‘믿고 보는 배우들’도 한몫했다. 2009년 초연 때부터 주연을 맡은 정성화, 2010년부터 함께해온 양준모, 민우혁 등이 안중근 의사로 분했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막이 오르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자작나무 숲. 안중근과 동지들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이다. 독립 투사들이 손가락을 끊어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노래한다. 이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붙잡혀 순국하기까지 1년간의 이야기가 2시간 동안 펼쳐진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영상·무대 디자인, ‘칼군무’가 펼쳐지는 추격 장면에 감탄했다.

뮤지컬 ‘영웅’ 중 넘버 ‘추격’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 중 넘버 ‘추격’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완성도 높은 음악과 무대에 비해 서사는 놀라울 정도로 부실하다. ‘영웅’은 강철 같은 신념과 높은 이상을 지닌 독립투사를 재현하는 데 주력하면서, 다른 인물들을 지워 버렸다. 안중근의 동지들은 어떤 신념과 이상을 품었는지, 어떤 싸움을 이어왔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조선인의 설움에 공감하고 자기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돕는 중국인 왕웨이(황이건)의 사연이 궁금하지만, 뮤지컬은 답하지 않는다. 

뮤지컬이 역사를 기억하고 재해석하는 한 방법이라면,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머문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더 조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중근을 선택했다면, 그의 집안이 배출한 또 다른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인 어머니 조마리아, 여동생 안성녀, 며느리 오항선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 속 주요 독립운동가는 모두 남성이다. 몇 안 되는 여성 캐릭터를 구축하고 활용하는 방식은 게으르고 답답하다.

중국 소녀 ‘링링’(윤진솔·오윤서)을 보자. 오빠를 따라 조선인들을 돕던 열여섯 소녀는 안중근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 일본 경찰이 쏜 총알 앞에 뛰어들어 안중근 대신 죽는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사랑스럽고 순수했던 성녀(聖女)의 죽음은 안중근, 링링을 사랑한 소년 유동하(김도현·임규형) 등이 독립투쟁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된다. 오직 신파를 위해, ‘안중근과 (남성) 동지들의 독립투쟁’ 서사를 쌓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다.

뮤지컬 ‘영웅’ 중 링링(윤진서), 유동하(김도현)가 부르는 넘버 ‘내 마음 왜 이럴까’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 중 링링(윤진서), 유동하(김도현)가 부르는 넘버 ‘내 마음 왜 이럴까’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 중 ‘설희’(정재은)가 부르는 넘버 ‘내 마음 왜 이럴까’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 중 ‘설희’(정재은)가 부르는 넘버 ‘내 마음 왜 이럴까’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그나마 비중이 큰 여성 캐릭터 ‘설희’(정재은·린지)도 아쉽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서 살아남은 궁녀가 스파이가 돼 일본으로 향한다. 기생이 되고, 이토 히로부미(김도형·서영주·최민철)의 애첩이 돼 암살을 시도하나, 실패하곤 기차에서 뛰어내려 죽고 만다.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인데, 뮤지컬은 인간 설희의 삶과 욕망엔 별 관심이 없다. 설희는 “뜨거운 조국애를 지닌” 여성으로 요약된다. 답을 정해 놓았으니 상상력을 발휘할 틈도 없다. 그저 안중근과 (남성) 동지들의 독립투쟁이 얼마나 간절하고 중대한 일인지를 강조하는 역할로 소비된다. 데뷔 10년 차 베테랑(정재은)이 소화하기엔 아쉬운 캐릭터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어떤가. 실존 여성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유일한 캐릭터다. 3남 1녀 모두를 독립운동가로 길러냈고, 그 자신도 가문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황해도에서 국채보상의연금을 출연했고, 삼화항 패물폐지부인회에서 활동했고, 만주·연해주·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2008년 안중근 집안에서 여성으론 유일하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았다. 뮤지컬에선 이 ‘여성 영웅’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 편지로 항일 의지를 강조하긴 하나 아들을 옥바라지하는 ‘어머니’로만 등장한다. 10년 전이면 몰라도, 역사에 가려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재조명하는 시대에 이런 수준의 재해석이라니 안타깝다.

뮤지컬 ‘영웅’ 중 넘버 ‘사랑하는 내아들 도마’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 중 넘버 ‘사랑하는 내아들 도마’의 한 장면. ⓒ에이콤 제공

안중근의 투쟁에 집중하던 극이 후반부에선 갑작스레 동양평화론을 꺼내 드는 것도 어색하다. 일본인 교도관과 함께 “서로서로 인정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서로 자리를 지키며 조화롭게 사는 것”을 이상이라며 노래하는 안중근이 왜 그런 가치관을 갖게 됐는지, 왜 무장 투쟁에 나섰는지, 그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의 무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뮤지컬은 답하지 않는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큰 뜻을 품었으니/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는 모호한 노랫말만 남겼다. ‘영웅’은 오는 17일부터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다시 관객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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