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아니 에르노 읽기’ 연재에 이어 문화예술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필자의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편집자주)

지난해 10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회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600년에 걸쳐 수집한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소장품 96점을 선보였는데 회화, 공예품, 갑옷, 태피스트리 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홍보된 ‘흰옷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이외에도 눈 앞에서 보는 기쁨을 안겨주는 귀한 작품들이 많다. 루벤스의 작품들을 위한 전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앞에 서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그림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바흐를 들으면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신들의 살아있는 표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더 없이 좋다.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의 대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은 웅장하고 화려한 당시 궁정행사의 광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마치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5~1807)을 보는 느낌이다. 

피터르 파울 루벤스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1620~1625)
피터르 파울 루벤스 ‘주피터와 머큐리를 대접하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1620~1625)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1773)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1773)

특히 프랑스혁명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의 눈에 들어온 그림은 18세기 프랑스 궁정화가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의 작품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번 전시에 초상화가 함께 소개된 합스부르크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프랑스로 간 딸을 성숙한 여인으로 그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비제 르 브룅을 베르사유궁으로 가게 해서 공주를 직접 보고 그리게 했다. 이 그림은 1778년 작품이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23살 때였다. 그런데 그림에 나오는 왕비는 성숙하고 우아한 패셔니스트의 모습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딸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네 멋진 초상은 너무 귀엽구나. 리뉴 왕자도 똑 닮았다고 하더라. 아무튼, 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1778)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1778)

그런 찬사가 나오기까지는 화가의 공도 있었다. 『비제 르 브룅: 베르사유의 화가』의 저자 피에르 드 놀라크는 왕비의 더 정확한 생김새는 사실에 더욱 충실한 뒤플레시스, 베르트뮐러, 쿠샤르스키가 그린 것들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바라던 대로 또 대중의 감정이 보고 싶어하던 대로 이상적인 초상을 그렸다”는 것이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린 화려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비제 르 브룅의 그림만이 진정한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왕실에게 흡족한 그림을 그린 비제 르 브룅은 그 뒤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계속 그리게 된다. 그런데 비제 르 브룅의 그림들에 나타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우리가 떠올리던 ‘악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실 왕비는 온갖 괴담들을 통해 알려진 만큼 악녀는 아니었다.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에는 프랑스혁명 당시 재판에 넘겨진 왕비를 천하에 몹쓸 인간으로 몰아간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심문을 맡은 위원회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여덟 살 반 짜리 자기 자식을 성적으로 유혹했던 ‘색정광’이라는 혐의까지 씌웠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이성적인 인간, 정상적인 시대라면 전혀 믿지 않았겠지만, 당시의 혁명적 상황 속에서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츠바이크의 설명이다. 하지만 혁명은 왕비를 기요틴 위에 세워야 했기에 그녀를 희대의 악녀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그림을 얘기하면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다비드의 작품을 빼놓을 수 없다. 1793년 10월 호송마차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가던 그녀의 모습을 거리에서 지켜보던 다비드가 순식간에 종이 위에 스케치로 그렸다. 그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에서는 이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어느 사이에 일찍 늙어버린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손을 뒤로 묶인 상태에서도 허리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모습에서는 처형당해야 할 죄수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 (1793)
자크 루이 다비드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 (1793)

이 그림을 그린 다비드는 평생 권력을 쫓아 그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렸던 화가였다. 역시 죄수 호송마차를 탄 당통은 다비드를 발견하고는 “못된 종놈 근성 같으니"라고 경멸의 욕설을 퍼부을 정도였다고 한다. 츠바이크의 표현대로 “혁명 중에는 폭군의 적대자였던 그(다비드)는 새 독재자가 나타나자 제일 먼저 방향을 돌려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그렸던” 인물이었다. 그러니 다비드가 처형당하러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일부러 의연하게 그렸을 이유는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왕비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생에 대해 구차하지 않았음은 전해진 각종 일기와 편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2년 8월 14일 탕플 탑 감옥에 갇혀 쓴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나의 아이들이 없다면, 내가 어떤 상태가 될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내가 아니라 나의 아이들을 위해 이 길고 고통스러운 운명을 감수할 것이다.” (뱅자맹 라콩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비밀 일기』)

종종 구전(口傳)이나 텍스트 보다 그림이 역사적 사실들을 제대로 알려줄 때가 있다. 물론 같은 인물이 화가들의 시선에 따라 다양한 모습들로 그려진다. 그 여러 시선이 모이고 합해져 비로소 한 사람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이 유추되는 것 아닐까. 본래 역사 속의 한 인물에 대한 평가도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어쩌면 츠바이크의 다음과 같은 얘기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가장 평균적이고 사실에 근접한 평판일 것 같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 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 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이유의 장미』)

서울의 박물관에 걸린 마리 앙트와네트에게서는 사치와 허영에 눈먼 왕비의 모습도, 어린 아들을 유혹한 성도착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화가가 그렇게 그려준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사실은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그녀의 초상화 앞에 서서 연민과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혁명이란 원래 그런 것이야’라는 소리는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합스부르크 600년전’의 인기가 계속되자 국립중앙박물관과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은 전시를 2주간 연장했다. 그래서 폐막일이 3월 15일로 늦춰졌다. 하지만 이미 마지막 날까지 전회 매진이다. 이 글을 읽고는 가보고 싶어도 달리 방법이 없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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