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화 ‘다음 소희’로
8년 만에 돌아온 정주리 감독
2017 ‘콜센터 현장실습생 사망사건’ 모티브
한국영화 최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
외국 관객들도 공감·호응

“몰랐던 현장실습생 ‘노동착취’ 실태
동시대 어른으로서 부끄러워...
섣부른 희망보단 문제 제기하는 영화
아닌 건 아니라고 해도 괜찮다 전하고파
강력한 동지 배두나·비범한 김시은 고마워”

영화 ‘다음 소희’로 8년 만에 돌아온 정주리 감독을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여성신문사에서 만났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로 8년 만에 돌아온 정주리 감독을 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여성신문사에서 만났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아이가 죽었다. 2017년 1월, 전북 모 특성화고 학생이었던 고 홍수현(19)양은 LG유플러스 전주고객센터로 현장실습을 간 지 124일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콜센터와 무관한 애완동물학을 전공했던 아이는 ‘욕받이 부서’로 불린 해지방어팀에 투입돼 성희롱, 감정노동, 임금착취 등에 시달렸다. 책임지는 어른은 없었다.

2020년 말, 정주리 감독은 제작사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대표에게 “이 사건을 영화화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시나리오도 없는 제안에 곧 마음을 빼앗겼다.  

그렇게 나온 ‘다음 소희’는 한국영화 최초로 지난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올랐다. 2014년 ‘도희야’에 이어 두 번 연속 칸영화제에 입성하는 기록을 썼다. 상영 후 7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어진 파티에서 25세 포르투갈 청년이 다가와 꾸벅 인사하곤 영어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습니다’ 하더군요.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똑같다’던 니카라과·인도 관객들도 만났어요.”

북미 최대의 장르 영화제인 캐나다 판타지아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돼 감독상·관객상을 받았고, 프랑스 아미앵국제영화제 3관왕, 일본 도쿄필맥스영화제, 중국 핑야오국제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았다. 지난 8일 국내 개봉해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얻고 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는 춤을 좋아하는 씩씩한 18세 소희(김시은 분)가 졸업을 앞두고 현장실습을 나가면서 겪는 착취와 폭력을 담았다. “고교 현장실습생 노동 실태를 파악할수록 의문이 들었어요. 학교는 왜, 어떻게 애들을 이런 곳에 보내는 거지? 가장 취약한 아이들이 가장 열악한 노동 여건하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동시대의 어른으로서 느낀 부끄러움도 고백했다. “(홍수연 양이 겪은 일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가 한창일 때 벌어졌더라고요. 저도 나 하나라도 보태서 이뤄야 한다는 마음에 광화문 촛불시위에 갔었죠. 대통령 탄핵은 나와 가까워도, 고등학생의 죽음은 멀게만 느껴졌는데요. 그렇지 않더라고요. 내가 알고도 지나쳤거나, 나도 몰래 방관하지 않았나 싶었어요.”

유가족들도 만났다. ‘다음 소희’ 제작이 확정되자 고 홍수연양 아버지 홍순성씨를 찾아가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전주 촬영장에서도 여러 번 만났다. 개봉 전 시사회에도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을 초청했다. 홍순성씨와 현장실습 희생자인 고 김동준군 어머니 강석경씨, 열악한 방송 노동 실태를 고발한 고 이한빛 PD의 가족 등 산업재해 희생자 유족이 다수 참석했다.

“(유족들이) 영화화에 걱정도 많으셨을 테고, 일반 관객보다 영화를 보는 마음이 더 힘들 수밖에 없는데도 ‘영화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해 주셨어요.” 정 감독은 “영화 속 소희 부모님이 무기력해 보일 수 있는데, 실제 홍수연 양 부친은 경찰, 국회 등에 직접 찾아가 책임을 묻고자 노력하셨다. 그런 모습이 영화 속 유진의 행동으로 재현된 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현장실습생 연쇄 사망 사건을 다룬 2017년 3월18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허환주 프레시안 기자),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작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허태준 작가) 등이 제작에 큰 도움이 됐다. 따로 노동 현장이나 관계자들을 직접 심층 취재하진 않았다. “영화는 영화”며 창작자로서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다음 소희’는 섣불리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는 현장실습생 제도 실태를 파헤치던 유진(배두나 분)이 느끼는 절망과 무력감을 생생히 그렸다. “(실제 희생자들이 존재하는 만큼) 영화를 만드는 자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어요. 제가 파악한 현실을 보여드리고 관객과 공감하고 싶었어요. 다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유진이 있었고, 유진이 형사나 공직자였으면 했어요.”

정 감독에게 배두나 배우는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동지”다. “배두나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이 영화가 나올 수 있었어요. 애초에 배두나가 연기한 유진을 상상하고 기대했기에 시나리오를 쓸 수 있었죠. 배두나는 제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어요. 연기 실력이야 두말할 필요 없고요. 너무나 중요하고 어려운 인물을 (배두나는) 어떻게 표현할까 기대하고 상상했고, 촬영장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흥분되는 순간이 많았죠. 스태프들, 동료 배우들도 잘 챙겨요. 한겨울에 코로나19가 겹쳐 더 어려울 때 우리의 힘을 북돋웠어요. 영화가 제대로 완성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큰 힘이 돼줬어요.”

김시은 배우에게도 찬사를 보냈다. “어디서 이런 친구가 나왔나. 너무 큰 행운이었죠. 첫 번째로 만난 배우를 그 자리에서 캐스팅했으니까요. 그 친구도 대담했고 저도 보는 눈이 대단했죠. 하하. 김시은 배우가 ‘소희가 꼭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는데, 배우로서 비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 장면 한 장면 찍으면서 우리 둘 다 맞았구나, 내 생각대로 비범하다.”

콜센터 팀장으로 분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최희진 배우에 대해서도 “최희진이라면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해 쓴 캐릭터”, “그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인데 기대 이상이었다”라고 호평했다.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 스틸.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속 청소년들이 겪는 모욕과 폭력은 현실이다. 지금도 많은 사회초년생이 안전장치나 제대로 된 사전 교육 없이 현장에 투입되고 있다. 실적 압박과 초과근무 등에 시달려 기본 노동 조건이 지켜지지 않는 사례도 빈번하다.

공론화나 저항·연대의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게 체념은 가장 쉬운 생존 전략일 수도 있다. 정 감독은 비슷한 고민을 겪는 이들에게 “의심해도 된다. 아니다 싶으면 아니라고 말해도 된다.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아니다 싶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무시할 수 없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전했다.

정 감독도 영화계의 다양한 한국영화감독조합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영화계 성차별·성폭력, 저작권법 개정 문제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앞서 2014년 젠더 편견과 폭력 속에서 연대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도희야’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고, 제7회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 신진여성문화인상도 거머쥐었다. ‘다음 소희’ 스태프 모두 성폭력 예방교육을 받았고, 미술감독과 촬영 퍼스트 절반가량이 여성이었다.

여성 영화인들의 활약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 영화인들이 영화와 생활을 병행하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결혼·출산 후 현장에 돌아올 수 있는 여성은 거의 없다”고 일침했다. 영화 제작인력의 40%는 여성으로 채우게 하고, 촬영장 근처에 탁아시설을 설치하는 스웨덴의 사례를 들며 한국 영화계의 변화를 촉구했다. 또 영화가 얼마나 성평등한지 가늠할 수 있는 ‘벡델 테스트’의 도입도 권장했다.

차기작 계획을 묻자 아직 공개할 수 있는 건 없다면서도 “(‘도희야’ 후) 8년 만에 돌아왔으니, 그 절반인 4년 안에 다시 관객들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도희야’ 이후 한동안 여성들의 관계성을 그린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는데, 제작 투자가 엎어진 후 보류한 상태다. 

그는 “‘다음 소희’는 극장에서 볼 때 가장 온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 함께 보는 경험이 중요한 영화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인도에서도 리메이크 버전이 제작된다고 한다. 꼭 같이 일해보고 싶은 배우론 윤여정을 뽑았다. “그분이 하셔야 하는 캐릭터가 제 머릿속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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