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문화이야기]
아니 에르노 읽기5. 『세월』

『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1984BOOKS 펴냄)
『세월』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1984BOOKS 펴냄)

아니 에르노의 『세월』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가 쉽지 않다. 책의 두께도 두꺼워졌고, 60여년의 시간을 거치는 프랑스 사회사와 함께 가는 내용인지라 그에 따르는 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책이 주는 메시지는 이번에도 강렬하다.

책의 첫 장에는 “우리는 다만 우리들의 역사를 가졌을 뿐이고, 그 역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라는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역사와 개인의 삶이 분리’되어 있더라는 에르노의 생각을 예고하는 말이다.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라는 에르노의 첫 문장 또한 개인들의 기억에 남지 않는 역사를 의미한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에르노의 시선은 변함없이 꼼꼼하고 예리하다. 그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세월』에서는 ‘나는’이라는 표현 대신 ‘그녀는’이라는 3인칭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개인’이 아닌 ‘우리’의 얘기를 담은 집단적 기억에 관한 글이 된다. 에르노는 자신이 글을 쓰면서 가졌던 고민을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지금까지 분리되고 조화가 깨진 그녀만의 수많은 장면들을 서사의 흐름,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 한데 모으고 싶어한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 있는 삶. 그녀는 시작하는 순간, 늘 같은 문제에 부딪친다. 어떻게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이 여자의 내면의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그녀의 인생과 역사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역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다. 모두 그녀 안의 상(像)에 불과할 뿐. 몇 개월 후, 그녀에게는 댈러스에서 일어난 케네디 암살 사건이 지난여름 마릴린 먼로의 죽음보다 더 별거 아닌 일이 될 것이다. 8주째 생리가 오지 않고 있으니까.”

에르노는 프랑스 사회를 흔들었던 격동의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살았던 자신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기에 이른 에르노가 말한 것은 “한 개인의 삶에 역사는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적인 발언들과 세계의 사건들을 어떻게 느꼈는지 평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다만 드골을 반대하며 알제리 프랑스 시절에 어렴풋이 파묻혀 있던 이름, 기력이 팔팔한 후보, 프랑수아 미테랑을 뽑는 것에 희열을 느꼈을 뿐이다. 한 개인의 삶에 역사는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그날그날 그저 행복하거나 불행했다.”

그런 그녀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일 뿐이다. “그녀가 진짜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녀가 혼자 있을 때나 아이와 산책할 때 찾아온다. 그녀에게 진짜 생각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 옷을 입는 방식, 유모차를 배려한 인도의 높이, 장 주네의 ‘병풍들’ 공연 금지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닌 그녀 자신에 대한 질문들, 존재와 소유, 실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불륜의 사랑에 대해서도 용기있게 기록했던 에르노는 감히 역사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주 열어보지 못했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을 더는 설명하려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이제 프티브루주아가 됐다.”

에르노는 글을 시작하면서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정작 60여년에 걸친 자신의 시대를 하나하나 꼼꼼히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과 함께 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에르노의 글은 자전적 얘기이지만, 시대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우리’의 얘기이다. 격동의 역사 속에 살았던 개인을 조금도 미화하거나 꾸미지 않고, 개인으로서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에르노의 솔직한 용기가 이번에도 무척 인상적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과 그녀에게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어떤 교차점도 없다. 두 개의 평행선의 연속이다.”

정념이 뜨거웠던 그 시절, 역사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도,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고 자탄했던 최명란 시인의 고백도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난들 모두들 시를 계속 썼고, 밥을 먹었고, 섹스를 했고, 자식들 걱정부터 했다. 그러니 이제 나이가 들어 에르노의 얘기가 사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덮었다. '역사적 삶'이라는 말의 덧없음을 떠올리며. 

문득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반시대적 고찰Ⅱ: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애당초 ‘역사적 삶’이 우리의 당위가 될 것은 아니었다. 에르노의 기억이 가장 사실적일 수 있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유창선 작가. 사진=홍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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