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첫날인 18일 오전 광주 남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입학 후 처음으로 운동장 체육대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첫날인 18일 오전 광주 남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학생들이 입학 후 처음으로 운동장 체육대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내가 다녔던 여자 고등학교의 운동장은 자주 비어 있었다. 운동장 내에 설치된 골대들도 체육 시간에나 한 번씩 쓰일까 인기가 없었다. 그 주인 없는 골대를 우리와 라이벌이었던 인근의 남자 고등학교 학생들이 차지하곤 했다. 점심시간이 돼서 급식소로 가던 나는 불청객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학교에서 뭐 하는 거야?”

그때는 공을 향한 유난한 집착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군대, 조기축구회로 이어지는, 과장을 조금 보태면 남자의 일생이 곧 공놀이라는 게 우습기도 했다. 도대체 그 공놀이가 뭐라고?

그러나 훗날 어른이 되고 페미니스트가 돼서야 그들의 공놀이가 그냥 놀이가 아님을 알았다. 공놀이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남성 집단을 향한 사랑과 자긍심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남의 학교까지 와서 공을 차던 그 애들은 공놀이 자체보다 남성 집단의 일원임을 확인하기를 더 좋아했던 거다.

페미니즘 대중화와 함께 여성 집단 내 연대 의식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 여성들은 이제 막 연결되기 시작했음에도 단시간에 놀라운 연대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세상이 여전히 기울어져 있고 가야 할 길이 멀어서인지 몰라도, 우리가 지금보다 더 커지고 더 끈끈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소수집단에 소속된 개개인이 연대 의식과 자긍심을 키우는 일은 사회운동의 동력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나 이는 하루아침에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여성들 사이에서도 존재하는 여성 혐오가 드러나거나 심지어 우리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될 때 애써 고취한 연대 의식과 자긍심이 맥없이 흩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비어 있던 운동장과 골대를 떠올렸다. 그 옛날에 놓친 기회가 뒤늦게 아쉬웠다. 책을 읽고 단짝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즐거웠지만 만약 우리가 여럿이 모여서 뛰어놀았다면 어땠을까. 팀을 만들어서 다른 팀과 경쟁하고 때로는 승리에 취하는 경험을 일찍부터 했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수월하게 하나가 됐을지도 모른다. 여성들에게는 우리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줄 수 있는 놀이가 많이 부족하다.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주짓수를 함께 배우는 친구와 스파링 중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특별히 우스울 일이 없는데 항상 하나가 웃으면 나머지도 따라 웃는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공백이 있었지만 함께 운동한 시간이 어느새 6년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새로운 운동을 배우거나 땀을 흘리면서 보냈더니, 보통의 친구들과 다르게 독특한 친밀감이 쌓였다.

우리가 보낸 시간은 여행지에서의 하루가 직장에서 보내는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 항상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못 하는 일을 해냈던 추억이 남아서인지 그 어떤 기억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때 엄청 힘들었지’, ‘그날 재미있었지’ 하고 옛날이야기를 꺼내도 좀처럼 사건이 겹치거나 혼동되는 일이 없다.

단언하는데 여성들이 함께 해야 할 건 다이어트가 아니다. 혼자 하기 힘든 다이어트를 함께 하기 위해서 다이어트 메이트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만 해도 울적하다. 우리에게는 할머니가 돼서도 같이 놀 수 있는 체력을 키울 운동 친구가 필요하다.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면서 사명을 운동친구라고 지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이름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즉석에서 떠올렸다. ‘여성이 재정의한 운동문화를 통해서 여성의 건강과 주체성을 바로 세우고 스포츠 우먼십을 선도한다’는 미션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운동친구 활동으로 다양한 여성들과 만나면서 운동이야말로 여성 집단의 연대 의식을 고취할, 훌륭한 수단임을 수차례 확인했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한 번도 게토를 형성한 적이 없다. 우리는 사회에서 비주류이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남성을 따라서 뿔뿔이 흩어진 채로 살아간다. 이런 우리에게 운동장이 새로운 게토가 되어줄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고 우리끼리 울고 웃는 서사를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라도 운동 친구 한 명은 꼭 만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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