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여행길에 앞서 불현듯

집안 정리하지 않고는 떠날 수 없을 것이란 절박감

장사는 해마다 더 안 되고 더위는 해마다 더 심해진다더니, 정말이다. 10년만의 폭염이 온다고 하기에 웬 허풍(?) 하고 우습게 봤는데 그게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더위하고 싸울 생각일랑 언감생심 접어놓고 그저 납작 엎드려 지내는 판인데 그것조차 힘에 겹다.

게다가 정치고 경제고 온통 우울한 소식만 들려오는 탓에 올여름은 유난히 후텁지근하다. 그래서 그런지 집안이 더 어지럽고 추레하게 보인다. 이사 올 때만 해도 운동장같이 넓었던 거실이 어느 결에 대폭 줄어들어 조금만 움직여도 발길에 걷어차이는 게 많기도 하다. 하긴 이 집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만 4년이 다 돼 가는 판이니 이 정도 걸을 공간이 있다는 게 기적일지도 모르지.

지난 번 이삿짐을 정리할 때 앞으론 숟가락 하나라도 절대 사 들이지 않고, 있는 거 열심히 버리면서 살겠노라고 그토록 다짐을 했건만 집안을 둘러보니 마치 이동 잡화상을 방불케 한다. 반듯한 거라곤 밥상 두 개 하고 압력 밥솥 밖에 산 기억이 없는데 저 잡동사니들은 언제 잠입해서 집 안에 떡 버티고 있는 걸까.

내가 낳은 아이들 말에 따르면 나는 아주 독특한 능력의 소유자란다. 집안이 아무리 어질러져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감각을 타고 났다나. 자기들이 어렸을 땐 남의 엄마들도 다 그러려니 했는데 좀 철이 든 다음에 알고 보니 그 능력은 아무나 타고 나는 것이 아니었단다. 원 녀석들, 흉도 이쯤 되면 예술이다.

아무튼 정리에는 적성도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이지만, 이런 나도 가끔은 집안을 말끔히 치워 놓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와 말끔히 치워 놓아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손님을 치를 때냐고? 아이고, 내 주제에 손님은 무슨. 몸 아프다는 핑계로 손님 치러 본지 아득하다. 손님을 치르지 않다 보니 예전엔 그나마 가끔씩 했던 청소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건 바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마음먹었을 때다. 그 순간 집안을 정리해 놓지 않으면 길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은 절박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여행에는 죽음의 예감이 스며들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는데 떠난 자리가 너무 지저분하면 남은 사람들이 흉을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작용하나 보다.

솔직히 이 불확실한 세상에 죽음이 어찌 먼 길에서만 기다리고 있으랴만, 그러니 매일 매일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살아야 하겠지만 우매한 인간이 어찌 일상에서 도를 이루겠는가. 먼 길 떠날 때라도 그런 마음을 먹으니 다행이지. 하지만 워낙에 없던 능력이 갑자기 생길 리도 없으니 결국 마음만 조급한 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기 마련이다. 청소, 청소, 노래만 하다가 떠나기 직전 어느 날 벼락치기 시험 공부하듯 겨우 실행에 들어간다. 물론 의욕만 높았지 능력이 안 따라 주는 덕분에 결국 집안의 극히 작은 부분을 들쑤셔 놓는 걸로 알량한 작업은 끝나고 만다.

여름 여행을 앞두고 엊그제 이틀 동안 벼락치기 청소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시금 쓰레기 생산자로서의 인간인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4년간 책 두 권 쓴 것 이외에 내가 한 일은 엄청난 쓰레기를 생산해 낸 것 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두 세 차례에 걸쳐 20리터짜리 종량제봉투를 꽉꽉 채워 버리곤 했는데,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재활용 쓰레기를 따로 버려 왔는데 그러고도 집안에 남아 있는 이 엄청난 쓰레기라니!

글자가 쓰여 있는 종이는 단 한 장이라도 함부로 못 버리는 오래된 버릇 때문에 이틀 동안 투입한 시간에 비해 정리된 공간은 극히 미미했다. 하나마나다. 땀만 한 양동이 쏟아낸 나는 집안을 말끔히 정리해 놓고 떠나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버리기로 했다. 더 욕심을 냈다간 아예 떠나갈 힘조차 다 말라버릴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우리끼리 얘기지만, 어차피 죽은 다음에야 흉을 보건 말건 무슨 상관이람. (한 친구는 이런 배짱 가진 사람은 절대로 사고가 안 날 테니 염려 놓으라고 위로를 해 준다)

박혜란/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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