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마이 라이프]
20년째 조기축구 즐기고
통기타 동호회원들과 공연도
“어릴 때부터 예체능 가까이하면
창의력·협동심 늘고 즐겁게 살 수 있어”

동원그룹 기혼여성 촉탁제 폐지
양성평등 도모 GS리더포럼 이끄는 등
한국사회 여성차별 개선 힘써
“성차별 줄고 여성 경제활동 늘어야
한국 경제가 발전한다”

아침마다 공 차며 그라운드를 누비고, 사람들 앞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는 70대. 박인구(77) 동원그룹 부회장은 인생의 후반전을 신나는 일들로 채우는 중이다. 20년 넘게 기업을 이끌며 성공 신화를 써온 그에게 잘 놀고 재미나게 사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은 자타공인 축구광이다. 아침 기온이 영하 12도까지 떨어진 지난 28일도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축구장에서 아침을 맞았다. ⓒ홍수형 기자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은 자타공인 축구광이다. 아침 기온이 영하 12도까지 떨어진 지난 28일도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축구장에서 아침을 맞았다. ⓒ홍수형 기자

서울 아침 기온이 영하 12도로 떨어진 28일 아침. 박 회장은 어김없이 등에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축구장으로 향했다. 자타공인 축구광이자 약 20년 차 양재조기축구회 열성 회원이다. 지난 설날 연휴에도 설 당일만 빼고 연휴 내내 그라운드에서 아침을 맞았다.

이날도 ‘FC양재’ 회원 약 20명이 눈이 채 녹지 않은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펼쳤다. “가자!” “한 골 넣자!” 함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박 회장은 우측 후방에서 볼을 주고받다가 골대 앞으로 달려드는 선수의 발 앞에 딱 맞는 크로스를 보냈다. 아쉽게도 바로 공을 빼앗겼지만 이후에도 공이 날아들면 전방으로 돌려보낼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한 조기축구회원은 “(박 부회장은) 최고령 회원이지만 대단한 선수다. 시야가 넓고 패스가 정확하다”고 했다. 

축구 활성화를 위한 사업도 펼쳐왔다. 2001년~2011년까지 대한축구협회와 함께 개최한 동원컵 전국유소년축구리그다. 구자철, 이청룡 등 국가대표들이 거쳐 간 무대다. 어린 선수들이 축구를 하면서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주말리그를 도입, 정착시킨 것도 의미 있는 성과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끈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의 인연도 잘 알려졌다. 생년월일(1946년 11월8일)이 같고, 8강전 승리에 감동해 ‘히딩크! 당신은 영웅입니다’라는 공개 편지를 보낸 일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 ‘FC양재’ 조기축구회원들과 28일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축구장에서 경기에 임하고 있다. ⓒ이세아 기자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 ‘FC양재’ 조기축구회원들과 28일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축구장에서 경기에 임하고 있다. ⓒ이세아 기자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 28일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축구장에서 몸을 풀고 있다. ⓒ홍수형 기자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 28일 서울 서초구 양재근린공원 축구장에서 몸을 풀고 있다. ⓒ홍수형 기자

통기타 연주도 박 부회장의 큰 즐거움이다. 기타 동호회 ‘폴라리스’ 소속으로 지역 요양원 위문 공연 등도 여러 번 열었으니 단순 취미라기엔 수준급이다. 코로나19 여파로 공백기를 가졌다가 다시 정기적으로 합주하고 있다. 오는 31일 서초구청장이 여는 주민과의 대화 행사 때 축하공연을 하기로 했다. 신중현 ‘빗속의 여인’, 김학래·임철우 ‘내가’ 등 7080 가요와 아리랑 모음곡 등 다채로운 메들리를 준비했다. 

지난 19일 양재2동 주민센터에서 열린 합주 연습 분위기는 즐거웠다. 참석한 4명 중 박 부회장이 가장 연장자지만 봐주기란 없었다. “집에서 아무리 해봐도 잊어버렸네. (악보를 가리키며) 한 번 하고 여기로 돌아온다고?” “아뇨 부회장님, 여기서 A코드로 다시 가라고요.” “나 틀렸어.” ”부회장님, 틀렸네! 하하하.“ 

박 부회장과 15년 넘게 함께 기타를 쳤다는 여성 회원들은 ”(박 부회장은) 정말 열정적인 분, 한다면 하는 분이다. 목소리와 발성이 좋아서 꼭 독주하셔야 한다“고 했다. 손사래를 치던 박 부회장은 노사연의 ‘돌고 돌아’를 직접 연주하며 열창했다.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 19일 양재2동 주민센터에서 기타 동아리 ‘폴라리스’ 회원들과 함께 합주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 19일 양재2동 주민센터에서 기타 동아리 ‘폴라리스’ 회원들과 함께 합주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오늘이 인생의 가장 젊은 순간이니, 스포츠도 악기 연주도 하고 싶은 일은 마음껏 해보라고 박 부회장은 조언했다.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 중산층의 기준은 모국어 외의 언어를 몇 가지 구사할 수 있는가, 악기를 몇 가지 다룰 수 있는가 등이죠. 우리는 아직도 그저 ‘돈’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일찍부터 다양한 경험을 쌓을 기회를 가져야 나이 들수록 잘 놀고 즐기며 살게 된다. 박 부회장이 예체능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다. “제가 축구와 경영은 닮은 꼴이라고 늘 말했어요. 창의성, 협동심, 페어플레이, 성실함, 성장을 모두 체득할 수 있다고요. 예체능 교육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비중을 더 늘려야 한다고 봐요.”

박 부회장은 1997년 동원그룹에 입사해 2008년 미국 참치 브랜드 스타키스트 인수, 2011년 세네갈 통조림 회사 SNCDS(현 S.C.A.SA) 인수를 주도했다. 경영자가 되기 전에는 29년간 공직자로 활약했다. 산업부에서 반도체 정책, WTO 협상 등을 맡았다. 

성평등 선진국인 미국·유럽연합(EU)에서 상무관으로 근무했던 경험은 박 부회장에게 한국 사회의 성 불평등에 의문을 갖게 했다. 제도적 변화에도 힘써왔다. 2000년 10월 동원F&B 사장 취임 직후 사내 촉탁제를 폐지했다. 유능한 여성 직원들이 결혼했다는 이유로 촉탁직(비정규직)으로 바뀌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직원의 절반이 여성이고, 주 소비자도 여성인 식품 기업이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여성 경력직 채용도 늘렸고, 여성 간부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양성평등을 도모하는 리더들의 모임 ‘GS 리더(Gender Sensitive Leder)포럼’이 발족한 2003년부터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2008년 제1기 여성부 정책자문위원단을 맡았던 기업인 9명 중 한 명이다. 2015년엔 성평등을 지지하는 남성들과 함께 유엔여성(UN Women)의 글로벌 캠페인 ‘히포시(HeForShe)’에 동참했다. 

우리나라 여성 경제활동 참여율은 59.9%로 OECD 국가 평균인 64.8%에 못 미친다. 박 부회장은 “그러면 안 된다. 아직 멀었다. 성차별이 줄어들어 여성들이 더 경제활동에 참여해야 우리 경제가 발전한다”고 말했다. 

여러 돌봄 정책 아이디어도 들려줬다. ”국가가 이른 나이부터 돌봄을 밀착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파트 1층마다 어린이집을 설치하는 겁니다. 정규 교육과정도 2년 더 일찍 시작하면 어떨까요. 초중고 과정에서 2년을 앞당겨서 그만큼 유치원 의무교육을 제공하는 겁니다. 기업은 세금을 더 낼 테니, 돌봄은 정부에서 지금보다 더 디테일하게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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