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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에 범국민 복장 콘테스트라는 게 열렸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

일기 시작한 때로 새마을운동복을 비롯하여 한복, 양장, 체육복, 교

복, 생활복 등 대여섯 부문으로 나뉘어진 가운데 나는 한복 부문에

출품을 해서 종합대상을 받았다.

내가 내놓은 작품이 깃 없는 두루마기라든지 어깨 진동선을 조끼식

으로 재단하고 색동을 네개 넣은 것들이다. 어깨와 진동을 조끼식으

로 재단한 것은 어깨가 넓은 사람이 좁아 보이는 효과가 있다.

그때 심사위원이 석주선 씨로 그 당시에는 그분을 직접 뵙지 못했다

가 2,3년 뒤에 어떤 토론회에서 만나뵙게 되었다. 섬유업계 사람들과

학자로는 석주선 씨와 한복 디자이너로 내가 참여했는데, 석주선 선

생님께서 나를 크게 비난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한복계를 이리자 씨

가 다 흐려놓고 있다, 우리 전통 한복은 그게 아니다, 어깨에 문양을

넣고 보를 달고 하는 게 옛날 궁중에서나 하던 거지, 어디 미스 코리

아 옷에 그런 걸 넣느냐. 또 천을 좍좍 이어서, 조각조각 이어 치마

를 만드는데 그런 치마가 어디 있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아니다, 어깨가 넓은 사람은 보를 달아 놓으면 좁아 보인

다, 痢??지금 왕이 있느냐 뭐가 있느냐 옛날 전통 복식을 오늘의

시대 감각에 맞춰 되살려 내고 입는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면 되는 거

지 왜 문제가 되느냐 하고 반박했다. 또 옛 궁중의 스란치마를 보면

속에는 남치마 입고 겉에는 빨간 치마를 입었다. 겹쳐 입은 게 아니

냐. 나는 그걸 밑에는 남색을 대고 위에는 빨강을 대서 치마를 하나

로 만든 거다, 하고 맞섰다.

서로 제 주장이 옳다고 맞서다 보니 토론회는 시끌시끌해지고 나는

그만 화가 나서 토론회장을 나와버렸다.

초기에 나는 학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전통 한복을 멋대로

변형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확고했다. 옷이란 시대를 반영하며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는 것이라

고 나는 생각한다. 전통을 제대로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고이 모셔만 둔다고 생명력이 있는 것일까. 현대 생활에 맞게, 실생

활에 활용할 수 있게 고치는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현대적인 감각에

맞춰 되살려내고 실제로 쓸 수 있게 하는 일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그러므로 학계의 비판을 경청은 하되 내 주장을 꺾지는

않았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서 학계의 비판 강도는 많이 누그러졌다. 물론

일부에서는 여전히 나를 못마땅하게 보는 이들이 있었지만 많은 학자

와 연구자들이 내게 많은 관심과 호의를 보여 주었다. 석주선씨도 그

뒤로는 나를 참 사랑해주시고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면 칭찬을 해 주

셨다. 내가 한복 패션쇼를 할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와보시고는

격려를 해주셨다. 그 토론회 뒤로 그분은 내게 참 든든한 선생님이

되어 주셨다.

70년대에 우리나라는 외교 분야나 무역 분야에서 활발한 정책을 펼

쳤는데, 그런 상황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세계 곳곳에 우리나라

대사관과 영사관들이 들어서는데, 그렇게 외국에 나가게 되는 외교관

부인들은 거의 다 우리 집에 와서 옷을 해입고 갔고, 그때마다 한복

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노라고 좋아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해

왔다.

또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꼭 한복을 한벌씩은 해갔다. 그런

이들이 우리 가게에 와서 한복을 맞춰 가지고 갔고, 무역관들이 해외

파견나가면서 해입고 가고, 그렇게 해서 '이리자 한복'은 점점 더

널리 알려졌다.

미스코리아 의상을 맡았던 것도 큰 힘이 되었을 것甄? 미스 코리

아 대회에 나오는 여자들은 우선 키가 크고 따라서 어깨도 보통 한국

여자들의 체형보다 넓기 일쑤였다. 그런 몸으로 전통 한복을 입으면

제대로 맵시가 안 난다.

에이라인 재단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깨가 좁아 보이는 것이었

다. 그 대회에 나갈 여자들이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서부터 시작한

미스 코리아 의상을 8년이나 맡아 했다. 특히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서 두 번, 미스 아시아대회에서 한 번 의상상을 탄 것은 내 손으로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세계에 알리게 되었다는 기쁨을 더해 주었다.

0년대는 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다른 한복 디자이너들이 활동하

기 시작한 것은 대략 80년대 이후다. 올림픽과 함께 아이피유니 아스

타 행사 같은 굵직굵직한 국제 행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면서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의 하나로 한복 패션쇼 같은 게 많이 열려 한복

디자이너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된 것이다.

범국민 복장 대회에서 종합대상을 받은 뒤로 신문이고 잡지에 소개

가 되자 손님들이 몰려오고 한복 주문이 쇄도해서 나는 72년쯤에 광

화문으로 가게를 넓혀 이사를 갔다. 옛 국제극장 바로 옆의 건물로

일층부터 사층까지 다 얻었다. 70년대 중반쯤 가서 나는 일하는 사람

을 한 70명쯤 두게 되었다. 한복 만드는 공정을 다 세분화해서 각 공

정마다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일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금박 놓는 사

람이 따로 있고, 수 놓는 사람 따로, 바느질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

다. 또 밑일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했고, 심지어는 배달할 사람도 필

요했다.

정초며 추석 같은 명절이면 신문이고 잡지고 한복 특집 기사를 내는

데, 그 옷들을 거의 다 내가 만들어냈다. 또 대사관마다 다 오라고

초청을 해서 항상 일년이면 두달씩, 몇번을 외국에 가서 패션쇼를 열

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를 안 가본 데가 없을 지경이 되었

다. 대사관뿐인가. 민족의상을 전공하는 디자이너 모임, 의상학 관련

모임, 이런 데서 초청하기도 했다. 그렇듯 사람을 하도 만나다 보니

나는 손님을 보면 그 자리에서 이 사람은 재계에 있구나, 공무원이구

나, 연예인이군, 하고 알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점점 바빠져서 집안 살림에는 거의 등을 돌리게되다시피 해도

식구들은 아무 불평이 없었다. 무엇보다 남편은 변함없이 나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든든한 동반자였다. 나만 바쁜 게 아니라 남편까지 내

일을 돕느라 정말 일어서서 밥을 잡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와

달리 남편은 참 꼼꼼해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가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 꼼꼼하고 차분한 성품으로 남편은 한복 가게의 행정적인

문제를 많이 도와주셨다.

자화자찬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복계에서 최초로 해낸 일이 꽤 된

다. 한복 디자이너라는 명칭도 그렇지만, 75년에 나는 최초의 한복

패션쇼를 열었고, 한복 코디네이션이라는 것을 시도했다. 또 진짜 한

복 마네킹을 만들었고, 한복으로 이루어진 달력도 내 옷으로 제작했

다.

1979년에 나는 일본 마네킹을 두 개 사서 인형연구가 허영씨에게 갖

다 줬다. 그때까지도 마네킹은 전부 서양 얼굴이었고 그런 마네킹을

만드는 회사는 몇 있었지만 한국 마네킹이란 것은 없었다. 나는 그게

영 꺼림칙해서 일본 마네킹과 함께 배우 김창숙, 장미희, 정윤희의

얼굴 사진을 건네주면서 한국인의 얼굴을 한 마네킹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그이가 최초로 그런 마네킹을 만들어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달력까지 이야기하고 가자. 기업들이 달력을 만

들어서 해외로 수출하는데, 그 모델이 될 한복을 여섯벌이든 열두벌

이든 내가 만든 것이다. 그게 70년대 초반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그게 뭐 그리 큰일인가 싶지만 사실은 큰일이었다. 회사가 한 군데가

아니라 대여섯개쯤 된다고 하면 내가 만들어야 할 옷이 몇벌이겠는

가. 서른벌에서 육십벌쯤 되는데, 저마다 다 다른, 또 저마다 다 독

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한복을 그만큼 지어야 되는 것이니 보통 큰일

이 아닌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하릴없이 부산을 갔다오곤 했다.

그 무렵 한창 고속도로를 공사할 때라 길이 가다가 울퉁불퉁 난리였

지만 나는 버스 안에 앉아 마냥 창 밖을 내다보며 서울과 부산을 오

고갔다. 창 밖의 산과 들을 바라보며 그를 배경으로 일년 열두달 계

절의 변화를 상상하며 갖은 색과 무늬들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렇게 머리 속에서 디자인을 하고는 옷을 만들었다. 그렇지 않고 가

게 안에 앉아 있었다가는 하루 종일 손님들 틈에 끼어 생각할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았을 거다. 고속버스를 타고 갈 때 비로소 나는 좀 쉴

수 있었고,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다.

1975년에 나는 혼자 한 삼십개국을 도는 세계일주를 했다. 그때만

해도 참 외국 나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계 여행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때였다.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돈도

1백불인가밖에 안 되었다.

그런 어려운 시절에 내가 감히 세계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돌아

가신 한국일보의 장기영 사장 덕택이었다.

그 전해인 1974년에 필리핀에서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가 있었는

데, 그 대회에서 내가 디자인해 만든 옷이 의상상을 탔다. 나는 그참

에 장기영씨를 찾아가 부탁을 했다. 내가 미스 코리아 의상을 담당하

게 된 김에 샤프론까지 겸하게 해서 대회가 열릴 때 나를 따라가게

해 주시오, 또 될 수 있는 대로 나를 해외에 많이 내보내 현지 답사

를 하게 해주시오, 했더니 흔쾌히 승낙하시는 것이었다.

뺐 해외현지 답사 생각을 한 것은 진작부터였다. 외교관 부인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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