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언론, 본질 벗어난 공격으로 여성단체 흠집내기

디지털·아날로그 세대 활동가감수성 충돌로 입장표명 늦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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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부/

임현선 기자

'박근혜 패러디'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진보적 여성운동을 이끌어온 여성단체들이 거대언론의 교묘한 공격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 이면엔 인터넷 문화의 홍수를 경험한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간의 감수성이 충돌한 흔적이 남아 있다.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C일보와 D일보는 패러디 관련 기사를 연달아 내보내며 '한국 여성운동의 앞날'을 개탄했다. 그 이유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성적으로 비하한'패러디에 대해 여성계가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것. C일보는 19일자 신문에 "지난 40여년 동안 여성 인권 목표아래 하나로 뭉쳤던 여성운동이 정파 싸움에 휘말려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며 강도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한발 더 나아가 "그동안 여성단체들이 국회 등에서 나온 성적 비하 발언에 대해 일제히 항의 성명을 내곤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 침묵은 현 정부의 여성장관을 다수 배출한 여성 단체와 특정 정파의 영합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며 열린우리당과 여성단체의 관계를 '유착' 관계인양 꼬집었다. 같은 날 발행된 D일보도 "여성단체는 지금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문제의 패러디는 신행정수도 건설과 관련해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입장을 교묘히 바꿔온 C일보, D일보와 한나라당과의 야합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마지막에 영화 '해피엔드'의 포스터에 실린 속옷 차림으로 누워있는 여배우 얼굴에 박대표의 얼굴을 합성해 놓고 침대에 앉아있는 남성의 얼굴에 C일보와 D일보 글자를 적어 언론과 야당의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했다. '

패러디 사건은 13일 D일보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재된 문제의 패러디를 기사화 하면서 알려졌다. D일보의 인터넷 기사에는 패러디의 글자부분이 모두 삭제되고 포스터만 올라 있는 데다, 여성의 얼굴을 흐릿하게 처리해 야한 분위기를 오히려 부추겼다는 평을 받았다. 패러디 원작자조차 "글자가 없이 사진만 보니 내가 봐도 야했다

고 말할 정도였다. 기사 내용은 더욱 선정적이었다.'박근혜 전대표가 상반신을 드러낸 채 침대에 누워있고 한 남자가 러닝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이라고 묘사해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추겼다. 패러디는 스포츠신문 등에 대서특필되면서 신행정수도를 둘러싼 '언론과 정당의 야합'을 비꼰 정치 패러디의 본래 의도는 사라지고 '성희롱'으로 논의의 중심이 옮겨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기자들에게 '논의중'이라며 일주일간 공식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자 C일보와 D일보는 '여성단체가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유'를 물으며 "(여성단체의) 존재 의미에 비판이 일고 있다"고 공격했다. 역설적이게도 언론사들은 신행정수도를 둘러싼 자사들의 말바꾸기 보도행태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교묘하게 여성단체의 존립근거 논란으로 돌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패러디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난 21일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은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여성연합은'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잘못된 정치 패러디'이며 '가장 중요한 책임은 청와대에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기자는 "겨우 이 정도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냐"며 빈정댔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여성운동가들은 운동의 어려움을 절감한다고 토로한다. 간담회에서 만난 40대 후반의 여성운동가는 "패러디 사태를 접했을때 우리 세대는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단체에서 일하는 젊은 후배들이 성희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매우 당황했다. 내부 논의를 거쳐야 했기에 성명서를 발표하는 시기가 늦어졌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간의 감수성이 충돌한 사건"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청와대 홈페이지에 10시간 넘게 게재된 것은 잘못됐다는 점엔 이견이 없다.

30대 초반의 여성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에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정치 패러디가 쏟아지는가. 박근혜 패러디는 영화 해피엔드의 줄거리를 고려했을 때 잘된 패러디도 아니었다."

그는 C일보와 D일보가 여성운동의 방향을 진정으로 고민한다면 앞으로 여성인권 지면을 늘려 기사화해달라는 주문을 덧붙였다.

인터넷이 가져온 가치관의 변화는 여성운동가들의 현실이 되고 있다. 영상세대라고 불리는 15살부터 35살까지 젊은 여성활동가들의 변화된 감수성에 선배 여성운동가들이 눈과 귀를 열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또한 여성단체들이 강한 소신과 전략, 전술을 갖고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사안들에 과감히 목소리를 높이는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

임현선 기자 su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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