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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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해서 쉬는 날을 바꿔 샌틸리에 있는 병원으로 모셔갔다. 몇 달 전 내가 받은 같은 검사, 같은 병원, 같은 의사다.

“마취 싫은데… 못 깨어나면 어떡해…” 차에서 몇 번을 되뇌었던 아내가 진료 수속을 마친 뒤 입가를 실룩대며 종이쪽지를 내민다. “뭔데?” 은행계좌 비밀번호. 이민 초기에는 은행 경력도 있고 상대적으로 영어도 나았던 내가 통장과 집안의 공과금 관리를 맡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내에게 넘기고 손 놓은 지 오래다. “왜? 못 깨어 날까봐? 싱겁기는.” 자기도 피식 웃는다. “검사나 잘 받으셔.”

“남편이죠?” 소리에 ‘덜컥’

아내를 들여보내고 대기실에 앉아 가져간 존 그리샴 소설의 한 챕터를 마쳐가는데 배가 싸르르, 신호가 온다. 젊어서부터 과민성으로 장에 탈이 자주 난다. 가족력도 있고 그래서 장 검사에 신경이 예민해졌나. 내가 받는 검사도 아닌데. 복도로 나가 화장실을 찾았다. 좌정하고 힘도 주기 전에 벨소리가 울린다. 모르는 번호인데 샌틸리라고 찍혀있다. “OO씨 남편이죠? 안으로 와주세요.”

마취도 채 안 됐을 시간인데… 겁이 덜컥 났다.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시술실 안으로 들어가니 흑인 간호사가 씨익 웃으면서 맞는다. 앞의 환자들이 밀려 많이 기다려야 할 것 같다며 심심하지 않게 아내 옆에 같이 있어주라고 불렀단다. 다정도 병이라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냐 따지고 싶었는데 영어로 하기에는 문장이 너무 길어 그냥 참았다.

“당신 심심해? 노래라도 불러줄까? 저 간호사 되게 재미있어 잘 웃고. 하여간 쟤들 하는 짓 싱거워.”

예상치 않게 주어진 둘만의 시간. 환자복 차림에 누워 얇은 담요를 걸치고 있는 아내를 보니 별것 아닌 검사인데도 오래 전 애 낳던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졌다. 지금이야 ‘출산 후 하혈로 위험했었다’ 한 문장으로 건조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때를 돌이켜 보면 아직도 아찔하다. 잘해줘야지. 내가 잘해야지. 삼십 분을 두서없이 출가한 애 얘기, 강아지 얘기로 보낸 뒤 아내의 차례가 되어 대기실로 다시 나왔다.

무탈한 아내가 사랑스럽다

귀로는 대기실 풍경을 듣고 눈으로는 인터넷을 뒤지며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적절하다 싶은 참에 다시 나를 부른다. 푹 자고 일어나는 아이처럼 아내가 배시시 마취에서 풀려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어라? 사랑스럽다. ‘배고파, 빨리 뭐 먹고 싶어…’ 무엇보다 마취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아내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그래서 더욱 사랑스럽다. 다시 다짐한다, ‘내가 잘할게.’

의사가 검사결과를 알려줬다. 위장, 대장 다 문제없다고. 영어를 하는 2세 의사다. 내 속을 두 번이나 들여다봤는데도 날 기억하지는 못하는 눈치다. 섭섭해 해야 하나. 마취기가 점점 더 사라지면서 아내의 말이 많아진다. 정말 괜찮아요? 한국 사람 위장치고 이렇게 깨끗한 경우 못 봤어요, 그래요? 한국 사람들이 그래요? 김치 같은 거 많이 안 드시나 봐요? 아뇨 나 김치 엄청 좋아하는데…

다 괜찮구나, 그런데 이상도 하지. 안도와 함께 연민은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일상도 돌아온다.

뭐야 나 때문에 속상해 못 살겠다더니, 내가 자기 속 다 뒤집어 놓았다더니 속만 멀쩡하잖아… 사진 봐라 분홍분홍 곱기만 하다… 그동안 나한테 씌운 누명 억울하다! 사과하라! 반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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