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뮤지컬 배우 정선아
임신·출산 후 1년 만에
국내 초연 뮤지컬 ‘이프덴’으로 복귀
데뷔 21년...뮤지컬 인생 2막 활짝
“복귀할 수 있을까 고민 많았지만
무대에 설 때 살아있는 느낌...
자만심 내려놓고 동료·스탭들과
믿음 저버리지 않는 무대 보여줄 것”

뮤지컬 ‘이프덴’으로 돌아온 배우 정선아. ⓒ팜트리아일랜드 제공
뮤지컬 ‘이프덴’으로 돌아온 배우 정선아. ⓒ팜트리아일랜드 제공

“복귀 무대가 19세 때 데뷔 무대보다 더 떨리더라고요. 겁이 많아지는 나이, 무대가 무서워지는 나이가 됐어요.”

‘뮤지컬계의 비욘세’로부터 이런 고백을 들을 줄은 몰랐다. 정선아. 노래, 춤, 연기 모두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배우다. 2002년 ‘렌트’로 데뷔할 때부터 천재로 불렸다. ‘아이다’, ‘에비타’, ‘위키드’,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 주역을 휩쓴 한국 뮤지컬 대표 배우다.

데뷔 20주년이던 2022년, 그는 엄마가 됐다. 약 1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정선아를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일하러 나오니까 좋아요.”

2022년 5월 딸을 낳고 7개월 만인 지난 12월 ‘이프덴’ 무대에 서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첫 공연을 마치고 들어와 스탭들 앞에서 ‘나 복귀했어’ 하고 울었어요.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제 새로운 인생을 향한 박수 같았죠.”

복귀작 ‘이프덴’은 귀한 여성 원톱 뮤지컬이다. 여성의 일, 사랑, 우정을 여성의 시선으로 다룬 작품은 많지 않다. 토니상 수상작 ‘넥스트 투 노멀’의 작가 브라이언 요키와 작곡가 톰 킷이 2013년 발표한 작품으로 국내 초연이다. 정선아는 이혼 후 12년 만에 뉴욕에 돌아온 주인공 ‘엘리자베스’를 맡는다. 인물의 선택에 따라 재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리즈’, 전공인 도시계획 분야에 뛰어들어 잘나가는 ‘베스’, 1인 2역을 소화한다.

정선아 배우가 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으로 열연하는 뮤지컬 ‘이프덴’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정선아 배우가 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으로 열연하는 뮤지컬 ‘이프덴’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여배우들에겐 탐나지만 만만찮은 도전이다. 150분 중 140분가량 무대에 선다. 1인 2역 간 장면 전환이 빠르고 대사도 많다. “기괴할 정도로 높은” 넘버는 또 어떤가. 감미로운 중창부터 폭발적인 솔로곡까지 소화해야 한다. 미국 초연 땐 ‘겨울왕국’ 엘사로 유명한 이디나 멘젤이 열연했다. 한국 공연엔 정선아, 박혜나, 유리아라는 최고의 보컬리스트들이 발탁됐다.

“제가 무대에서 편안해 보였어요? 아니에요. 매번 떨려요. 틀릴까 봐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체력 소모도 크고 화장실도 거의 못 가요.” 손사래를 치면서도 정선아는 “마침 제가 임신·출산을 겪지 않았다면 이렇게 맛깔나게 못 했을 것 같다. 적절한 시기에 운명처럼 해보고 싶었던 작품을 만났다”며 웃었다.

지난 1년간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친정 식구들을 포함한 가족들의 지원 덕에 아이를 낳자마자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지만, 임신·출산 후 피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변화에 자신이 없어졌다. “관객들이 날 잊으면 어쩌지? 출산하면 목소리도 바뀌고 살도 찐다던데,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별생각이 다 들었어요.”

‘이프덴’은 이렇게 끝없이 고민하는 제 이야기, 우리 이야기예요. 저는 중2 때 뮤지컬에 빠져서 10대부터 20년간 뮤지컬만 보고 달려왔어요. 내 이름 석 자, 뮤지컬 배우 정선아, 디바로서 멋지게 살아야지! 행복했어요. 다른 길을 선택하면 이 행복감이 무너질 것 같았어요.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으로 비혼주의자로 살았죠. 그런데 인생이 맘대로 안 되더라고요. 어쩌다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 아이를 낳았어요.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고요. 극 중 엘리자베스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죠. 제가 특별히 연기를 더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제 마음이 우러나와요. 관객들이 그 모습을 더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대극장 뮤지컬 디바’ 이미지도 깨고 싶었다. “드라마가 강한 작품에 늘 갈증을 느꼈어요. 언젠가 배우로서 연극을 해보고 싶고, 소극장에서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공연을 해보고 싶으면서도 두려웠죠. 관객들은 내가 대극장 무대에서 시원하게 노래하는 역할, 예쁘고 사랑스럽고 화려한 캐릭터를 연기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제게 ‘이프덴’이 운명처럼 찾아왔죠.”

‘이프덴’은 현대 여성이 겪는 여러 문제를 포함해 다양한 사회 이슈를 자연스럽게 건드리는 인상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게이·레즈비언 커플의 연애과 결혼 등 성소수자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묘사한다. 청년들의 주거 문제, 기후위기 문제도 다룬다. “귀한 작품이죠. 이런 작품이 잘 돼야 해요! 너무 좋다고, 해 보고 싶다는 후배들이 많아요. 제가 한 10년 하고 나서 비켜주겠다고 했죠. 하하하.”

뮤지컬 ‘이프덴’은 현대 여성의 일과 사랑, 인간관계 등의 문제를 포함해 레즈비언 커플의 연애와 결혼 등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다룬다.  ⓒ쇼노트 제공
뮤지컬 ‘이프덴’은 현대 여성의 일과 사랑, 인간관계 등의 문제를 포함해 레즈비언 커플의 연애와 결혼 등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다룬다. ⓒ쇼노트 제공
뮤지컬 ‘이프덴’으로 돌아온 배우 정선아.
뮤지컬 ‘이프덴’으로 돌아온 배우 정선아.

뮤지컬 배우들이 TV 드라마·예능, 영화 등 장르를 넘나드는 시대에도 배우 정선아는 뮤지컬 한길을 걷는다. “좋은 변화죠. 그런데 저는 카메라 앞은 좀 불안하더라고요. 많은 관객 앞에 설 때 마음이 편해요. 무대에 서야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축가를 부를 때 제일 떨린다니까요. 하하하.”

“뮤지컬이 천직”이라 단언하는 그도 선택의 갈림길에 선 적 있다. 2019년 승승장구하던 무대를 갑자기 떠나 1년간 중국에 머물렀다. 상해교통대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변화가 필요했어요.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도 뮤지컬이 너무 그리웠어요. 저는 무대에 있을 때 행복해요.”

지난 20년간 “나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고, 나만 생각하면서” 달려오는 동안 “내가 자만했구나”,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배우라면 누구나 내가 잘나서 잘 된 거라며 자만하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풋내기의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것에 감사해요. 동료들, 스탭들 덕에 멋진 무대를 보여줄 수 있는 거니까요. 이제는 조용히, 묵묵히, 건강한 모습으로 관객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배우”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뮤지컬에 대한 무모한 사랑, 열정, 동경으로 제 인생 1막을 시작했다면, 그런 사랑은 갔어요. 앞으로는 책임감을 갖고 ‘정선아 하면 뮤지컬, 뮤지컬 하면 정선아’라고 할 만한 무대를 선보이고 싶어요.”

지난해부터 경희대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미디어엔터테인먼트학과 교수로 출강 중인 그는 선배로서의 역할을 더 고민하게 됐다. 본받고 싶은 배우로는 최정원 배우를 꼽았다. “자기관리의 ‘끝판왕’이시죠. 후배들보다 더 건강미, 에너지 넘치는 선배, 늘 웃으며 긍정적인 에너지와 사랑을 주시고요. 선배님처럼 섹시하면서도 따스한 엄마까지 다 할 수 있는 유연한 배우를 꿈꿔요. 척박한 시대에 뮤지컬을 개척해 오신 1세대 선배님들께 감사해요. 전엔 몰랐는데 선배들이 계속 무대를 지켜주셔서 큰 힘이 돼요. 저희도 후배들을 위해 노력해야죠.”

끝없는 자기계발도 강조했다. “어린 천재는 있어도 나이 많은 천재는 없어요. 나이 들수록 노력하고 나만의 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 같아요. 세상은 계속 변하고 배움은 끝이 없어요. 저도 더 열심히 운동해서 체력을 기르려고 하고, 보컬 트레이닝도 받아요. 쉬지 않고 나를 단련하는 게 관객들에게 길게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이죠.”

20년 넘게 받은 사랑을 더 낮은 곳으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도 크다. 2021년부터 ‘기부콘서트’를 열고 있다. 콘서트 수익금은 한부모·장애인 등을 위해 기부해왔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노래와 연기니까요. 재능기부든 후원이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려고요.” 돌아온 정선아를 만날 수 있는 뮤지컬 ‘이프덴’은 오는 2월26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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