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 남긴
영국 브론테 남매의 삶과 예술 뮤지컬로
빈곤·억압에도 지지 않는 창작열·개성 표현
한국 초연...2월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 현장.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 현장.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19세기 영국의 브론테 자매(The Brontës) 이야기가 지금도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다. 여성에게 이름을 알릴 기회조차 주지 않던 시대에 비범한 글쓰기로 기어코 자신들의 역사를 남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이번엔 ‘록 뮤지컬’과 브론테들이 만났다. 지난달 대학로에서 개막한 뮤지컬 ‘웨이스티드’다. ‘샬롯 브론테의 인터뷰’라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 브론테 남매의 삶과 예술을 그렸다. 소설 『제인 에어』의 샬롯 브론테,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 앤 브론테, 이들을 지지하며 함께 창작열을 불태운 브랜웰 브론테 4명이 주인공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돈도 ‘빽’도 없이 예술을 고집했기에 시대와 불화한 이들의 이야기다. 페미니즘 메시지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작품이고, “가난한데 잘 배워서 너무 큰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을 위한 응원가다.

록 뮤지컬답게 강렬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패기, 실패와 좌절, 안타까운 죽음, 시대의 한계에도 꺾이지 않는 열정까지 감정의 진폭이 큰 이야기를 4인조 밴드가 포크록, 개러지 펑크, 하드 메탈 등 32가지 넘버로 표현한다. 스탠딩 마이크와 핸드 마이크를 번갈아 잡으며 몸을 흔들고, 원고지를 공중으로 던져 폭죽처럼 흩날리던 배우들이 “헛된(Wasted) 삶은 없다”고 합창하는 결말은 폭발적이다. 다만 곡의 난이도와 밀도가 높아서 배우의 감성과 가창력, 가사 전달력에 따라 극의 인상이 달라지기 쉽다. 

이나영 음악감독은 “록 사운드가 주를 이루지만 마냥 거칠고 날것의 느낌만은 아니다. 세련되고 섬세한 느낌도 공존하기에 균형을 잡는 데 무게를 뒀다”며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깃든 욕망과 이를 억압하는 사회의 압력이 만나 빚어내는 충돌을 음악 안에서 나타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뮤지컬 ‘웨이스티드’ 출연진. ⓒ연극열전 제공
뮤지컬 ‘웨이스티드’ 출연진. ⓒ연극열전 제공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 현장. ⓒ연극열전 제공
뮤지컬 ‘웨이스티드’ 공연 현장. ⓒ연극열전 제공

2018년 영국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번이 한국 초연이다. 연극 ‘타조 소년들’의 극작가 칼 밀러(Carl Miller)가 대본과 가사를, 로렌스 올리비에 어워즈 수상작 뮤지컬 ‘쇼스토퍼(Showstopper!)’에 참여한 크리스토퍼 애쉬(Christopher Ash)가 음악을 맡았다.

한국 공연은 진취적 여성 작가의 삶을 담은 뮤지컬 ‘레드북’과 전태일 열사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음악극 ‘태일’의 박소영이 연출을 맡았다. “라이센스 뮤지컬이지만 (배우만 바뀌고 원작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레플리카’는 아니라서 초연을 만들 듯 접근했다”, “(브론테 남매의) 좌절하면서도 꺾이지 않던 삶, 그 의지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 연극열전의 아홉 번째 시즌인 ‘연극열전9’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이다.

브론테 남매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도 즐길 수 있지만, 그들의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더 반가워할 정교한 디테일도 눈에 띈다. 브론테 남매가 남긴 문장을 가사로 활용하고, 그들이 실제로 썼던 작은 책상, 10cm 남짓한 소책자 등 역사적 고증을 거친 소품도 마련했다. 지난해 9월~11월 대학로 무대에 올랐던 네버엔딩플레이의 창작 뮤지컬 ‘브론테’를 본 관객들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겠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 분투하는 첫째 ‘샬롯’은 뮤지컬 ‘사의 찬미’,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아랑가’ 등에서 놀라운 무대 장악력을 보여준 배우 정연과 뮤지컬 ‘아가사’, ‘베르나르다 알바’, 연극 ‘세인트 조앤’ 등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준 배우 백은혜, 뮤지컬 ‘아일랜더’, ‘차미’, ‘금악:禁樂’ 등 성공적 캐릭터 변신을 해 온 배우 유주혜가 참여했다. 훌륭한 예술가로 기억되진 못했으나 작가, 화가, 연주자 등 다양한 시도를 했던 둘째 ‘브랜웰’로는 뮤지컬 ‘팬레터’, ‘판’,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 등에서 매력적인 음색과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인 배우 김지철, 뮤지컬 ‘비더슈탄트’, ‘썸씽 로튼’, ‘차미’에서 맑고 단단한 음색을 보여준 배우 황순종이 출연한다.

자신만의 확고한 예술세계를 가진 셋째 ‘에밀리’는 뮤지컬 ‘모래시계’, ‘리지’, ‘더 데빌’ 등에서 뛰어난 넘버 소화력을 선보인 배우 김수연과 뮤지컬 ‘포미니츠’, ‘리지’, ‘헤드윅’ 등을 통해 뛰어난 캐릭터 소화력과 흡입력 있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 홍서영이 참여했다. 현실적이었고 현실을 직시한 작품을 남긴 넷째 ‘앤’은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 ‘라 레볼뤼시옹’, ‘몬테크리스토’ 등에서 아름다운 모습 뒤 강인함, 반항심 등을 잘 표현한 배우 임예진, 뮤지컬 ‘데스노트’, ‘썸씽 로튼’, ‘비틀쥬스’ 등 대형 뮤지컬에서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과 뛰어난 가창력을 인정받은 배우 장민제가 열연한다. 2월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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