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한 영화 읽기]
13년 만에 돌아온 블록버스터
황홀한 시각효과와 그렇지 못한 서사
남성 중심 가부장제 사회 재현
여성 캐릭터는 강한 전사여도
여자친구·부인 역할 머물러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아바타: 물의 길’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아바타: 물의 길’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새로운 세계관의 탄생 이후 무려 13년이 걸렸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바다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려는 듯 천문학적 비용을 들였다는 물 CG와 함께 돌아온 ‘아바타: 물의 길’은 오랜 기다림만큼 황홀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하지만 시각효과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 뒤에 아쉬운 평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카메론은 명실상부 현시대 최고의 비주얼리스트지만, 훌륭한 이야기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탓이다.

물론 ‘아바타: 물의 길’이 추구한 것은 놀라운 비주얼이지 놀라운 서사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비주얼은 서사를 담는 그릇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스펙터클로 기능한다. 게다가 뻔한 플롯은 곧 안전한 재미를 보장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앙상한 서사에서 특정 인물들이 원래 가졌어야 할 부피감을 모두 빼앗겨 심각하게 납작해지고 만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러닝타임 내내 ‘제이크의 부인’으로만 묘사된 네이티리다. 실상 네이티리는 제이크가 자식들에게 뜨거운 부성애를 보여주거나 권력 이양을 암시하는 주요 장면마다 철저하게 소외된다. 피안에서 방금 잃은 아들과 재회할 때조차 네이티리는 한 걸음 뒤로 빠져 부자의 감동적인 접촉을 바라보며 그저 눈물 흘리기만 한다. 멧케이나 족장의 부인 로날이나 딸 츠이레야 역시 아직은 누군가의 여자친구나 부인 이상의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등장부터 관음적 시선에 노출된 츠이레야가 적극적으로 성애화되는 연출도 문제적이다.

영화 ‘아바타: 물의 길’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아바타: 물의 길’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어쩌면 이야기가 시작된 지점부터 무언가 잘못 설정됐을지도 모른다.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가모장 사회였다고 상상해보자. 그들은 『이갈리아의 딸들』이나 아마조네스처럼 엄격한 여존남비의 위계를 따를 수도 있었다. 훌륭한 전사인 여성이 부족장이 되어 공동체를 수호하고, 그의 남편이 신관이자 의사로서 정신적 보살핌을 제공한다. 이 가상의 나비족 사회에 떨어진 제이크의 생사는 장모 모앗의 손에 달려있었을 테고, 쓸만한 전사는 될 수 있어도 부족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네이티리의 두 번째 남편 자리에 만족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도 그가 나비족으로서의 새 인생을 받아들이고 네이티리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현실은 상상과는 정반대다. ‘아바타: 물의 길’에서 제이크에게 실제로 주어진 것은 부족과 가족에 대한 온전한 통치권이다. 그는 두 아들이 자신을 ‘sir’라고 부르도록 교육했고, 네이티리를 나고 자란 숲에서 떠나 실향민이 되게 한다. 부족과 생이별하며 슬피 우는 네이티리의 순종과 희생은 1편에서 보여준 전사로서의 위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제이크의 모든 판단은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는 존재’라는 낡은 가부장적 믿음과 상명하복의 군대식 질서에 근거한다. 운 좋게도 자신을 제약하던 모든 종류의 장애에서 벗어나 판도라 행성의 흠 없는 1등 시민으로 살아갈 자격을 얻었지만, 여전히 지구에서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않은 제이크 설리. 그런 그가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카메론의 나비족 사회는 지구의 인간-남성 중심주의 사회와 너무도 닮아서, 하나도 놀라울 것이 없고 그저 익숙한 피로감을 안길 뿐이다.

이 전형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카메론은 줄곧 즐겨 쓰던 인물 구성을 또 한 번 택한 듯하다. 강인한 여전사 유형의 조연을 제시해 ‘내 영화는 (현실을 최대한 반영하기 때문에) 여자도 약하지 않다’고 호소하는 것이다. ‘아바타’ 1편의 조종사 트루디와 과학자 그레이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라 코너를 생각하면 일견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확실히 그가 자랑스럽게 내세운 선상 전투 신에서 네이티리는 제이크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쿼리치 대령이 비웃었던 네이티리의 ‘야생성’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재해처럼 돌아와 위대한 전쟁 신의 징벌을 떠올리게 한다. 분노의 살육을 몰래 관람하는 스파이더의 눈을 빌린 관객은 하잘것없는 인간의 떼죽음에 이입해 압도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쿼리치 역시 ‘상병’ 제이크보다 네이티리의 화살을 더 두려워하는 티가 역력하다. 이만하면 네이티리가 상징하는 원시-자연-여성에 대한 감독의 애호는 증명된 셈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주체적이고 강력한 여성 인물은 이미 숱하게 등장해 ‘걸크러시’ 유행을 만들며 기대감을 높여 왔지만, 그들이 가부장-이성애주의의 강력한 덫으로 빠질 때 그 주체성이 흐릿해지고 가정의 천사에 지나지 않게 되어 겪는 실망도 숱하게 반복되어 왔다. 엄마가 된 네이티리 역시 그 실망감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영화 ‘아바타: 물의 길’ 캐릭터 ‘키리’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 ‘아바타: 물의 길’ 캐릭터 ‘키리’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제공

현실과 너무 가까운 어른들보다 오히려 시선을 끄는 것은 ‘혼혈’ 아이들이다. 설리 가족과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입양아 키리는 친부도 알 수 없어 ‘뿌리’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그는 인간, 아바타, 나비족 중 어느 쪽에도 확실히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무당의 운명을 타고났다. 키리의 영력이 발현될 때 인간 남성 과학자들은 이를 뇌전증이나 망상장애의 초기 증세로 진단하지만, 판도라의 여성형 신격인 에이와에게는 키리를 향한 다른 뜻이 반드시 숨겨져 있을 것을 관객은 알고 있다. 과학이 무시하고 조롱한 것을 자연이 되살린다는 아이디어는 에코페미니즘적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나비족과 어울려 살아온 인간 소년 스파이더가 생물학적 아버지에게 내비치는 적대감도 흥미롭다.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이야기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자식 세대가 그려갈 그림은 지금과는 사뭇 다르리라 믿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높은 확률로 제이크-네이티리의 서사를 재현하게 될 로아크-츠이레야보다는, 이종족 간의 경계에 서서 공생할 방도를 고민하게 될 키리-스파이더의 관계에 더 큰 기대를 걸어본다.

유해 작가는

회사원. 영화 읽고 책 보고 글 쓰는 비건 페미니스트. 브런치: https://brunch.co.kr/@yoo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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