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 NGO 포럼' 참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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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부장

9년 전 북경여성대회의 감동은 나처럼 대회에 참석하지 못한 까마득한 후배에게는 선배들의 허풍섞인 경험담뿐 아니라, 올림픽 경기장 같은 곳에 운집한 수만 명의 여성들을 담은 사진 한 장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나의 첫 국제무대 데뷔전(?)이 내년에 있을 북경대회 10년을 준비하기 위한 '아태여성NGO포럼'이라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한국참가단 코디네이터로서 40여 명의 다양한 국내 여성운동가들을 조직한 경험은 값진 것이었다.

동남아시아의 무덥고 후텁지근한 기후와 에어컨 빵빵한 대회장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심정으로 드나들고 1000여 명이 동시에 점심을 먹기엔 '매우' 부족한 식당에서 전쟁 치르듯 한 끼를 때우곤 했지만, 포럼은 매우 활기찼고 각국 참가자들의 표정은 밝고 따뜻했다. 대회 첫날 인도 전통의상을 입은 나에게 유난히 친근한 미소를 보여준 인도여성들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전체 대회 동안 진행된 4개의 대토론회는 많은 관심 속에 진행되었지만 발제가 다소 원론적 수준에 그쳐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참가자 누구라도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는 80여 개의 워크숍은 각국의 서로 다른 상황을 공유하고 향후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살아 있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대회기간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지막날 열린 북경행동강령의 12개 주요 관심 분야별 10년의 성과와 과제를 정리하고 성명서를 채택하는 시간이었다. 섹스 워커(sex worker)를 둘러싼 논란과 반미 논쟁, 그리고 노인여성·달리트 여성(불가촉천민여성)·이주여성 등 다양한 여성계층이 문건에 표현돼야 한다면서 대토론회장의 중앙통로에 수십 명씩 줄을 늘어서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은 여성운동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스스로를 'Young Women'이라 칭한 30여 명의 젊은 여성 그룹은 성명서에 'Young Women'을 포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10여 분 이상을 전체 참가자들과 찬반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women이라는 단어에 모든 종류의 여성이 포함되는 것이므로 young women만 별도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다수의 문제제기를 받고 스스로 이를 철회했다.

같은 여성 내에도 이처럼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거기 모인 우리 모두가 이런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며 합의를 모아 나간 과정은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다양성과 분화, 차이가 향후 여성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되기도 했다. 각국의 역사와 정치·문화적 상황에 따른 다양성, 세대별 다양성, 계층별 다양성 등 여성운동이 점점 세분화되고 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어떻게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어떻게 통합적·다각적 시각을 견지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난 6월 국내에서 여성정책 10년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우리의 과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포럼의 가장 큰 성과는 그 희망의 단초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각자의 지역에서, 각자의 운동영역에서 이런 고민들 때문에 머나먼 태국땅까지 모여든 것이 아닌가? 고민을 나누기 위해! 소통하기 위해! 자매애로 연대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이기에 방콕의 소중한 경험이 향후 소통과 연대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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