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인큐베이팅 플랫폼 ‘CK 플랫폼’ 작품
대학생이 번역, 연출, 연기 모두 소화

연극 '아임 낫 러닝' 한 장면. 사진=CK 플랫폼 제공
연극 '아임 낫 러닝' 한 장면. 사진=CK 플랫폼 제공

대한민국의 여성 국회의원 수는 2022년 현재 57명으로 전체의 19%이다. 6%에 불과했던 2002년과 비교하면 비약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전 세계에선 121위, OECD 38개국 중에선 34위로 매우 낮은 수준에 속한다. 나아가 국회 진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당내 주요 당직이나 요직의 임명 및 선출과정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곤 한다. 국회뿐만 아니라 내각에서도 여성에 대한 벽은 매우 높다. 역대 장관 927명 중 여성은 59명이며, 이번 정부의 핵심 고위공직자 중 여성의 비율은 고작 7.4%에 불과하다. 아직도 대한민국의 유리천장은 매우 견고한 편에 속한다.  

연극 <아임 낫 러닝>(I’m Not Running, 나는 출마하지 않는다)은 당권에 도전하는 한 여성의 정치 드라마이다. 주인공은 의사 출신의 하원 의원 폴린 깁슨이다. 자신이 근무하던 지역병원이 폐원될 위기에 처하자 폴린은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이 일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이어진 여론의 압도적 지지로 그는 노동당의 당권에 도전하라는 시민의 명령 앞에 서게 된다. 그는 과연 당 대표 선거에 입후보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제목은 마치 그것이 이 연극의 주제이자 전부인 듯한 착시를 만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의 입후보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보다 연극은 공영의료체계(National Health Service, NHS) 민영화의 문제와 앞으로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정치권의 비릿한 현실, 그리고 폴린으로 대표되는 여성과 그를 비롯한 소수자들에 관해 더 많은 장을 할애한다. 연극에는 폴린의 폴린과 함께 당권에 도전하는 변호사 출신 잭 굴드가 이 모든 갈등적 양상에서 폴린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진보 인사의 아들로 정치적 금수저를 타고난 그는 대학 시절부터 노동당에 입당한 진골 노동당 인사이다. 하지만 그는 지역병원의 폐원 설계에 참여하고, 여성 정치인으로서 폴린의 앞길을 가로막으려 한다. 여기서 그가 폴린의 옛 연인이었다는 사실은 사족일 터. 

연극 '아임 낫 러닝' 한 장면. 사진=CK 플랫폼 제공
연극 '아임 낫 러닝' 한 장면. 사진=CK 플랫폼 제공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이 작품이 여성이 아닌 남성, 그것도 일흔이 넘은 남성 극작가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이다. <아임 낫 러닝>은 영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David Hare)가 2018년 발표한 근작으로, 이듬해인 2019년 영국 국립극장 리들턴 극장(Lyttelton Theatre)에서 초연되었다. 연극에 관심이 적은 독자라면, 그가 각색한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디 아워스>(2002), <데미지>(1992)로 익숙할 것이다. 사실 그는 영화보다 연극에서 더 성공적인 경력을 가진 작가로, 국내에서는 국내 최초의 버베이텀 연극으로 꼽히는 <철로>(The Permanent Way, 2003)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사이의 논쟁을 다룬 연극<에이미>(Amy’s View, 1997), 진보와 보수의 문제를 다룬 <스카이라잇>(Skylight, 1995) 등 다수의 작품이 공연된 바 있다.  

한편, 지난 11월 11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트원시어터 3관에서 공연된 <아임 낫 러닝>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이번 <아임 낫 러닝>의 국내 초연이 오롯이 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아임 낫 러닝>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CK Performing Arts School, CK PAS)이 주관하는 콘텐츠 인큐베이팅 플랫폼 ‘CK 플랫폼’의 한 작품으로 제작되어 공연되었다. 학생들은 번역을 비롯하여 연출과 연기까지, 국내에 참고할 레퍼런스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작품을 공연하였다.  

<아임 낫 러닝> 외에도 이번 ‘CK 플랫폼’에선 ‘당신은 어떤 공동체에 살고 있나요?’를 화두로 하여, 가족 중 유일한 농인이었던 소년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농인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니나 레인의 희곡 <트라이브스>와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애도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이비드 린지 어베이르의 <래빗홀>이 공연되었다. 이 두 편은 기성 극단에 의해 이미 공연된 바 있지만, 학생들은 선배 창작자들의 작업에 기대지 않고 그들의 힘으로 새로운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아임 낫 러닝>은 한 마디로 ‘한 여성의 당권 도전기’이다. 출마를 번복한 후 폴린의 이야기는 쓰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이제부터가 폴린의 본격적인 시작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청강대 학생들의 이번 공연은 ‘학생들의 대학로 도전기’이다. 학생들 역시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폴린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땅의 여성 정치인들을 응원한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이제 막 대학로에 발을 들인 새로운 창작자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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