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와이프’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영화 ‘더 와이프’의 한 장면. 팝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더 와이프’의 한 장면. 

“나도 와이프가 있으면 좋겠어.”
1990년대, 주부들과 함께 하는 모임의 리더이기도 했던 (여)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집안일 다 해주는 와이프 말이야.” 그냥 공감이 오갔다. 영화 <더 와이프 The Wife>라는 제목이 자력으로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 것도 그의 말이 생각나서다. 주인공 조안 카스틀레만(글렌 클로스 분)과 올해 노벨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속 주인공인 작가 자신 모두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삶의 전체가 되는 여인들이다.

욕망의 교류

“당신이 글 쓰는 동안 아이 돌보고 식사 준비한 건 나야.”
영화 <더 와이프>에서 아내 조안이 평생 써온 문학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게 되는, 남편 조 카스틀레만(조나단 프라이스 분)의 이 대사는 소위 ‘살림남’을 생각나게 한다. 문학적 재능이 조안보다 부족한 조는 살림남의 자리에 앉지만 사회적 명성(공허한 것이라 해도)이 보상으로 따르기 때문에 할만해 보인다. 작품 제작을 ‘생산’으로 봤을 때 이 부부의 행위는 조의 말처럼 ‘나쁜’ 게 아닐 수 있지만 조안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건 기억을 해석하는 두뇌와 양심이다.

『단순한 열정』 속 아니 에르노의 의식은 조안과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한다. 아니는 젊은 시절의 선택(임신 중지)과 기혼남과의 연애에 대해 가차 없는 고백으로, 조안은 회한과 고뇌의 표정으로 기억의 해석을 들려준다. 성적 쾌락이 ‘사고의 마비’라는 결과를 만든 시간에 대한 기억. 지루하게 이어지며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삼류 불륜 스토리’를 노벨상에 기대어 참고 읽다 보면 보답이 온다.

아니는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의 증거로써 기억의 우물에서 남자의 성기를 건져 올린다. ‘그가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를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로서 자신이 느끼는 희열의 형상이라는 고백이다. 타자의 욕망은 나의 욕망과 분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대의 욕망을 촉발하는 효과를 낳는다. 교수실에서 조안의 작품을 읽고 재능을 알아본 조는 키스하고 조안은 반응한다. 조 부부의 침실 옷장을 들여다보고 서랍을 열어보는 행위, 애무하는 대로 목을 맡기고 있던 기억은 아니와 동일하게 조안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에 의해 확인된다는 고백이다. 

영화 ‘더 와이프’의 한 장면. 
영화 ‘더 와이프’의 한 장면. 

대사 퍼즐

이 영화의 불편함은 조안 스스로 주체적 삶에서 후퇴한다는 점에 있다. 조안은 조의 아내 캐롤(그라녀 키난 분)이 던진 조의 넥타이를 반사적으로 주워 든다. 또한 작가들의 모임에서 만난 여성 작가 일레인(엘리자베스 맥고번 분)의 한 마디, “쓰지 말아요. 아무도 읽지 않을 테니.”라는 말에 자기 암시를 받고 독자가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압도당한다. 여성 작가를 폄하하는 출판사 남자들의 대화를 듣고는 뒷방 작가로 남겠다고 결심하면서 조를 설득하는 장면은 공감보다는 전율을 일으킨다. 내성적 성격을 내세워 사회에 속하는 데 소극적이고 남편의 이름 뒤에 숨어 글만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에 물론 개연성은 있다. 문학 교수인 조가 이 순간 제자이며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인 조안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 자신의 명예를 택하는 현실 속 캐릭터라는 게 묘하게 씁쓸하다.

조 부부의 아이를 봐주러 간 장면에서는 “그게 그 여자애야?” 캐롤의 물음에 “이름은 조안이야.” 조가 대답한다. 캐롤은 왜 ‘이름이 뭐죠?’라는 물음으로 자신과 같은 여성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후에 정신과 의사가 되고 딸을 치과 의사로 키웠다는 것으로 주체적 여성을 대변할 수 있는가. 조의 사진 담당 여기자의 태도 역시 여성 관객의 수치심을 자극한다. 과학자이며 물리학상 수상자의 아내(조안의 모습에서 뭔가를 알아챈 듯 관심 있게 뒤돌아보는)에게는 성격을 표현하는 ‘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 감독이 남자임을 굳이 상기시키는 점이 아쉽다. 

영화 ‘더 와이프’의 한 장면. 
영화 ‘더 와이프’의 한 장면. 

선택과 기억의 오류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있다.”
조의 작품을 읽고 자신이 고쳐보겠다고 제안하는 조안의 이 대사는 ‘작품의 주제와 구성’이라는 큰 틀이 조에 의해 이미 만들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조안이 살을 붙여 완성하는 작업을 하면서 부부의 역할 분담이 시작된다. 부부의 구체적인 분업을 설명해주는 감독의 힌트는 조안이 비행기 안에서 몰두하고 싶어 하는 ‘낱말 퍼즐 맞추기’와 조가 들고 있는 습작 노트. 이 부부의 비밀을 파헤쳐 전기를 써보려는 나다니엘(크리스천 슬레이터)에게 “다음 작품을 쓸 용기를 갖는 게 중요하다.”라는 조의 말도 거짓이 아니다.

조안은 기억을 분석해내는 작가다운 명석함으로 결국 자기 환멸에 이른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인간이다.”라는 말은 자조적이지만 뚜렷한 자아 인식이 이루어낸 고백이다. 거리에서 본 ‘구토하는 행인’으로 표현된 자기혐오와 함께 ‘킹 메이커’라는 그림자 역할은 자신이 원한 게 아님을 깨닫는다.

조는 교수로서 소설 작법의 기본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작가들의 모임에 데리고 가고 지지해줌으로써, 일차적으로는 조안을 성장시키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성적 행위’로 사고력을 마비시키고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고의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순간에 여성을 대하는 남성의 행위의 결과는 개인의 실존과 극복의 과제가 지닌 다채로운 형태와 무게를 설명한다.

‘문학 작품의 공동 제작과 역할 분담’이 합의된 후에는 상대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없고 완전범죄로 정리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난국을 대신 떠안아 통증을 느끼는 아들 데이빗(맥스 아이언스 분)이 존재한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씀, 최정수 옮김. 문학동네) ⓒ문학동네
아니 에르노의 소설 『단순한 열정』  ⓒ문학동네

거대한 고요

아니 에르노의 기억들이 가져다준 ‘내면에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라는 결과물은 ‘문학적 영감으로 승화될 가능성’으로, 열정, 혹은 개인의 수난(passion)의 시대가 끝난 후에 갖게 된 단련되고 제련된 자산이다. 반면 조안 카스틀레만의 기억의 웅덩이에서 급부상하는 선명한 젊은 날의 선택들은 아들 데이빗의 고통의 근원이 돼 돌아오면서 조안의 ‘고해’를 요구한다.

여자를 유혹할 때마다 조이스의 시를 읊조리고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조의 말은 위선일까. “다 그만두고 조용한 데 가서 오두막이나 짓고 살자.” 조의 이 대사는 조안과 관객에게 거듭 무시당하지만 배우 조나단 프라이스의 내면 연기로 알아낼 수 있다. 재능 없어도 노력해야 하는 평범한 숙명의 작가, 문학 교수라는 전직이 멍에가 되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

아니 에르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준’ 사람으로 ‘그’를 표현하게 됐을 때, 유품이 된 조의 습작 노트의 빈 페이지를 조안의 손이 비로소 어루만질 때, 아니와 조안의 눈은 ‘거대한 고요’ 안에 있게 된다. 

필자: 문수인 작가. 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현재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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